8월의 기억
8월의 기억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8.3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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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은 유명한 사람들의 기억보다 존중받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의 구조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들에 바쳐진다.’

프랑스 접경지역인 스페인 까탈루나 포르부시에 있는 유태계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 기념비에는 그의 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나오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직접 가 보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폭염에서 가을로 훌쩍 넘어간 느닷없음으로 8월을 보내면서 ‘기억’과 ‘역사’를 생각한다.

8월의 ‘기억’과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지금의 ‘역사’는 불편하다.

최악의 폭염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할 지경인데, 유독 가정용에만 적용되는 전기요금 누진제는 불편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한쪽으로만 치우치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라의 안전보장, 즉 안보조차 해 낼 수 없는 처지가 불편하다. 점입가경인 것은 사드 배치 장소마저 우왕좌왕, 갈팡질팡 헤매면서 끝내 주민과 주민, 그리고 지역과 지역 간의 갈등과 반목, 질시를 만들고야 마는 세상은 불편을 뛰어넘는 참담함이다.

머나먼 땅 리우에서 투혼을 불사르던 대표선수들에 대한 잔인한 댓글과 인신공격도 불편하기 그지없는데. 그나마 금메달만 최고였던 인식이 옅어지고 있음에 위로가 된다.

우리는 지금 극단적 대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보수꼴통과 종북좌빨로 양분하는 세태에 중립지대는 없다. 청년실업과 철밥통, 금수저와 흙수저의 사이에 서로에 대한 헤아림은 자라지 않는다.

이토록 지겨운 편 가름과 대립에는 이상하게도 도덕과 비도덕의 구별과 차이는 실종되고 있다.

순수와 불순으로 편 가르기를 하면서도 옮고 그름에 대한 사유와 성찰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불신과 혐오만이 난무하는 세상으로 빠르게 전이되고 있다.

지배세력에 의한 것이든, 알게 모르게 스며든 사회적 병폐 현상으로 치부되든 간에 비도덕적 양태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도덕은 권장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자리에는 그저 무작정 기분 나쁘거나 적절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혐오 또는 극혐의 집단적 행위로 표현되는데, 이는 관념이 아닌 취향에 불과하다.

하기야 하얼빈과 뤼순을 구별하지 못하는 역사적 무지와 더불어 내 편과 네 편만큼은 엄정하게 구별되는, 그리고 그 판단에 사회적 공감은 무시되는 지경인데 관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계층과 계층, 지배세력과 국민 사이의 헤아림과 넘나듦을 통한 소통과 경계, 그리고 차이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기대할 수 없다.

도덕보다는 법으로, 또 국기문란이라는 극단으로 표현되는 일이 거듭할수록 사람들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탈출구로 나타나는 양태가 진실과 정의, 그리고 진리 대신 개인적 취향이나 감정으로 치우치는 일이 관습으로 굳어지는 사회는 황폐하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악플이고 극혐으로 치닫는 혐오라면, 그리고 그런 세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이렇게 진단하는 나도 어렵다. 차라리 청량하게 높아진 하늘을 보며 가을의 서정을 낭만적으로 쓰고 싶은 심정이다.

다만 지겨운 폭염을 닮은 8월,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이 양심을 찌르는 일이 없다면 말이다. 쓰라린 기억들은 빨리 잊을 수 있기를…. 다만 다가오는 9월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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