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노래하다
귀뚜라미 노래하다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6.08.30 20: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비가 내렸다. 바람 한 점 없이 무덥기만 했던 날씨가 하룻밤 사이에 거짓말처럼 선선해졌다. 남편은 반바지에서 긴 바지로 갈아입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다닐 때 바람이 차다고 했다. 나도 고온의 튀김기 앞에 서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올여름 폭염에 거실을 점령했던 작은아이도 제방으로 들어갔다. 바람 한 점 들지 않는다는 구석진 방에서 선풍기 바람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웠던지 아예 이부자리를 들고 나와 거실에서 잠자리둥지를 틀었던 아이였다.

올여름 계속되는 폭염에 괴롭고 힘든 이가 어디 우리 아이뿐이었으랴. 농작물들은 생기를 잃어 하늘만 바라보며 말라가고 우리 집 베란다에 다육식물들도 찜 솥에 찌어낸 듯 잎들이 물러 주저앉은 것들이 꽤 여러 개여서 빈 화분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내 속도 타들어갔다.

막힌 곳 없어 창문만 열어놓으면 바람이 잘 드나드는 고층 아파트라 간간이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두 해 여름을 무탈하게 보냈다. 이 집에 사는 동안은 에어컨이 없어도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올해는 두 아이 모두 목소리를 높여 에어컨을 설치하자고 한다.

남편도 내 눈치를 보며 잘 생각하라 한다. 냉방기를 설치하게 되면 혹시나 베란다에 가득한 다육이의 생육조건이 나빠질까 걱정하는 것이다. 햇빛과 바람, 온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다육식물의 특성 때문에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는 통풍을 위해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생활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 집 베란다는 사람들의 영토가 아닌 다육식물과 초록식물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영토의 주인인 내게 미리 의사를 묻는 것이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견디기 힘든 더위가 찾아온다면 아이들은 또다시 에어컨 타령을 할 것이 분명하다. 남편도 거기에 한 표를 보탤 것이고 어쩌면 나도 백기를 들고 에어컨을 설치하자는데 동의할지도 모른다. 십여 년 넘게 키워온 다육식물들을 포기할 수도, 더워 못 견디겠다는데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폭염이 이어질수록 내 고민도 깊어졌다.

내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위를 처분한다던 처서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하룻밤 사이에 기세등등하던 폭염을 처분해 버렸다. 이건 분명 하늘의 농간이다. 생각할수록 신기해 하늘이 관장하는 일이 이렇게 오묘할 수도 있구나 싶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하늘을 보았다. 이삼일사이에 많이 높아지고 청량하다. 모두가 버거웠을 올여름, 자신들의 안위보다 섭씨 170도가 넘는 튀김기 앞에서 일하는 나를 걱정해주는 이들이 많아 고온의 튀김기 온도보다 더 마음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베란다 다육이들도 그새 폭염을 잊었는지 생기를 되찾아 가을 맞을 채비를 한다. 이제부터 보란 듯 제 몸을 곱게 물들이며 치장을 할 것이다. 덩달아 나도 제대로 된 베란다 영토의 주인행사를 하게 되었다. 다육이들이 폭염을 잘 견뎌내고 이겨낸 덕분에 내가 누리게 될 호사가 감사할 뿐이다.

살아가면서 올해와 같은 폭염이 또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사람 사는 세상 이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찌 날마다 평온한 날들만 있겠는가. 폭염처럼 견뎌내기 힘든 시간이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물러날 것 같지 않던 폭염이 하룻밤 사이에 선들바람에 자리를 내어주듯 찾아오리라.

어디서 귀뚜라미 한 마리 가게로 들어와 귀 뚜르르 노래한다. 아! 가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