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는 것과 길들여 가는 것
남기는 것과 길들여 가는 것
  • 안승현<청주시문화재단공예세계화 팀장>
  • 승인 2016.08.30 2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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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 안승현

내가 근무하는 책상 앞 모니터 한옆으로 참으로 멋진 컵이 하나 있다. 오래 쓴 탓인지 윗부분엔 실금이 있고 표면에 덮힌 유약의 잔금에 배인 자국이 멋스러운 녀석. 요즘 표현되는 간지 난다고나 할까.

처음 내게로 왔을 땐 그저 산청토에 화장토가 입혀진 상태, 거기에 청화로 점 몇 개가 찍혀진 머그컵이었는데. 몇 년의 시간 함께하며 이제 한껏 세월의 멋을 자아내고 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을 같이했다. 밖에서 일하고 들어온 나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스산하고 한기를 느낄 때면 늘 따뜻한 커피 한잔을 대접해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같이했다.

컵이란 것, 이 컵은 무엇을 담았을 때 자신의 존재를 보여준다. 술을 담던, 물을 담던, 그 무엇을 담을 때, 상대를 품었을 때나 돼서야 자신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잘 드러나지 않게 말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면 그땐 무엇을 담지 않아도 자태를 느끼게 된다. 멋스럽게 배인 자국이 그간 품었던 것들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작가는 완성을 보지 못한다. 단지 기본의 형태를 만들 뿐이다. 그것이 작가의 몫이다. 작품의 완성이란 것은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공예는 사용하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그 멋스러움이 달라진다. 완성도가 달라진다.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함께하는 사람과의 길들이기를 통해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길들이고 길들여지고 이것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물건이라고 하는 공예품은 늘 나보단 어떤 것을 품을까 하는 시작에서 만들어지고 품고 담아내고 베풂의 시간을 반복하며 자신의 멋스러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 하나의 물건 또한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컵을 인지할 때 가마 안에서 꺼낸 사람만을 기억하지만, 사실 흙을 채취하고, 순수한 앙금을 만들어내고, 형태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여러 과정의 수고로움이 있다.

음식을 요리함에, 식재료를 키워내는 사람의 수고로움과 요리하기 전 숙성시키고, 조미료를 만들어내는 수고로움이 일련의 과정이자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마지막 표현한 한 사람이 돋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의 컵은 오랜 시간 나와의 시간을 같이하는 시간보다 이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남긴다. 큰 재산이나, 명예를 남기려 노력도 한다. 그런데 정말 정이 가는 것은, 서로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땟물들이 만들어낸, 시간의 자국이 있을 때 깊고도 잔잔한 감동을 느낀다.

이 순간에도 나에게 이놈은 내 눈을 내 손을 끌어당긴다. 그래 나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네가 금이 가고 땟물이 들었어도, 보잘것없는 형태인 너지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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