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의 증세
늙음의 증세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8.2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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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 김태봉

한 번의 돌아봄도 없이 마냥 앞으로 가기만 하는 세월 앞에서 사람은 누구라도 늙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상에 매몰되어 살다 보면, 자신이 늙었음을 자각 못 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어느 우연한 순간에 문득 늙었음을 깨닫게 된다. 과연 늙음의 증세는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평소 즐기던 바깥나들이가 심드렁해졌다면, 이는 나이 먹었다는 증좌가 될 수 있다. 남제(南齊)의 시인 왕적(王籍)은 나이 든 증세를 어느 계곡을 거닐다가 갑자기 느꼈다.

 

약야계에 들다(入若耶溪)

艅艎何汎汎 (여황하범범) 오왕의 배는 얼마나 둥실거리는지
空水共悠悠 (공수공유유) 하늘과 물은 함께 아득하여라
陰霞生遠岫 (음하생원수) 구름과 놀은 멀리 산봉우리에 생기고
陽景逐回流 (양경축회류) 햇빛은 소용돌이 물을 따라 옮아가네
蟬噪林逾靜 (선조임유정) 시끄러운 매미소리에 숲은 더욱 고요하고
鳥鳴山更幽 (조명산경유) 새의 울음소리에 산은 더욱 그윽하네
此地動歸念 (차지동귀념) 이 땅에 와 산수를 보니 집에 돌아갈 마음 생기고
長年悲倦遊 (장년비권유) 나이가 들었더니 나그네 생활도 싫증이 나네


여황(艅 )은 오(吳)의 왕이 타던 배 이름이다. 그만큼 화려하다는 뜻일 게다. 화려하게 꾸민 놀잇배를 타고 찾아가는 곳은 바로 약야계(若耶溪)라 불리는 강이다.

이곳은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동남쪽 약야산(若耶山) 아래에서 북쪽으로 흘러 경호(鏡湖)로 흘러들어 가는 강이다. 이 강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월(越)의 미인 서시(西施)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시인은 화려한 배를 타고 유명한 강을 유람하는 호사로운 여행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둥실거리는 배,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물, 멀리 산봉우리에서 피어나는 구름과 노을, 소용돌이 물을 따라다니는 햇빛,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주옥같은 광경들이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는 이곳이 얼마나 고요한 곳인지를 반증하고, 새 소리가 많이 나는 것은 이곳이 외진 곳임을 웅변한다.

유명한 승지를 화려한 배를 타고 돌아보는 호사에, 고요하고 깊은 오지의 맛까지 더해진 유람이니, 유람치고는 최고의 유람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유람에 싫증이 나는 것은 웬일일까? 바로 나이 때문이다. 즐겨하던 유람마저 심드렁해지는 것은 바로 늙음의 증세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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