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여름휴가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08.2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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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이런 더위는 아마도 난생처음이지 싶다. 이럴 때는 해가 뜨기 전에 서둘러서 일하는 것이 상책이다. 네 시에 일어나 슬슬 준비하면 다섯 시에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더운 해에 복숭아나무가 아직 어려 일이 적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날마다 서너 시간씩만 바짝 하면 풀 관리나 도장지 정리, 수확 등의 일을 웬만큼 치울 수 있다. 일에 몰입해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어느 순간 머리카락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면 슬슬 대지가 달궈진다는 신호다. 그러면 지체 없이 일손을 멈추고 물을 뒤집어써 더위를 쫓아낸다.

그리고는 과수원 입구 교육장으로 들어 가버린다. 복숭아 몇 알, 핸드폰, 라디오, 몇 권의 책, 그리고 커피를 준비하고 본격적으로 피서를 즐기는 것이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책을 보다가, 라디오를 듣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갉. 모두가 어렵다고, 전기요금 누진세가 겁나서 에어컨을 틀지 못한다고 아우성이지만, 나는 올해 처음으로 이 여름을 시원하게 나 보기로 작정했다.

포도농사 35년, 복숭아농사 3년. 그 세월을 나는 한 번도 칠팔월 폭염에도 휴가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잔일 많은 포도농사 지으면서 휴가는커녕 밤잠을 줄여가며 일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올봄에는 일부 남겨두었던 포도나무를 다 캐냈더니 일이 확 줄었다. 그러자 남들의 것이라고만 여겼던 그 여름휴가가 기적처럼 내게도 온 것이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이 기적을 어찌 아니 즐길 수 있겠는가. 자식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그동안 수고한 내게 스스로 장하다 격려하면서 한 번의 요금폭탄은 감수하리라 각오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모처럼의 휴가가 문득 가시방석처럼 편치 않으니 이게 무슨 일일까. 몇십 년 만에 누리는 이 호사를 완벽하게 즐기지 못하고 전면의 창을 통해 열기 가득한 바깥을 내다보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런 찜통더위에 복숭아 수확을 하는 이웃들이 생각나서다.

어쩌다 마주치는 이웃들은 폭염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많이들 수척해 보였다. 따는 작업이야 새벽에 한다지만, 선별해서 박스에 포장하는 작업은 종일 해야 한다. 더위가 아무리 고약해도 가격이 좋으면 좀 신명이 날 텐데, 경매가가 영 시원찮게 나오니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마는 것이다. 하긴 평생 포도농사만 지어온 나 같은 사람도 포도나무를 캐내고 복숭아나무를 심었으니, 가격이 곤두박질 치는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되고 보니 포도 농사꾼들에게는 변절자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에, 복숭아 농사꾼들에게는 넉넉지 못한 밥상에 슬쩍 숟가락을 올려놓은 미안함 때문에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다. 농사꾼에게 쥐구멍이 어디 따로 있겠나. 마음이 복잡해지면 밭으로 나가는 수밖에.

제대로 즐기리라 잔뜩 벼른 휴가건만, 그새 또 밭으로 나가 어슬렁거린다. 주인이 에어컨 바람 앞에서 신선놀음하는 사이 나무는 더위가 힘에 겨워 잎이 다 축 늘어졌다. 땡볕이 아무리 맹렬해도 단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나무, 나무들. 적자에도 농사는 지을 수밖에 없는 농사꾼의 입장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한 줄금 비라도 내리면 나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지친 잎사귀들이 싱그러워지며 가지가지마다 무성한 신록을 피워올릴 것이다. 머지않아 끝나고야 말 나무의 시련, 농사꾼에게도 지금의 시련이 모쪼록 너무 길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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