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위각(만권루)
완위각(만권루)
  • 박경희<수필가>
  • 승인 2016.08.2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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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박경희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나는 결국 이뤘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렸을 따름이다.’(조선의 독서왕 김득신 묘비 글 中)

조선시대 최고의 민간 도서관으로 일컬어지는 완위각을 찾아보기 전에 떠오르는 김득신은 완위각과는 물리적으로 직접 연관성은 없다. 다만 완위각이 당시로는 상상하기 쉽지 않을 정도인 만권이 넘는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경이로운 만큼 한권의 책을 11만 번이나 읽었다는 김득신 역시 신비로울 만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인물이다.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에 완위각(宛委閣)이라는 옛 가옥이 있었다. 이 집은 조선 숙종조 유학자 담헌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 낙향해 1711년에서 1712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영조 때 문신이며 서예가인 강준흠(姜浚欽)은 ‘독서차기讀書箚記’라는 글에서 완위각을 월사 이정귀의 고택, 안산 류명천의 청문당, 류명현의 경성당(竟成堂)과 함께 조선의 4대 장서각으로 꼽았다.

조선시대 진천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완위각이 있는 진천 초평면 용정리는 그 한가운데 있다. 당시 과거 길에 오른 남도 선비들은 그 길가에 있었던 이 집에서 묵어갈 수 있는 일정을 선호했다. 그 선비들은 완위각을 도서관으로 여겨 구하기 힘든 책을 찾아보거나 토론을 나누는 아카데미로 활용했다.

이하곤은 숙종시대에 널리 알려진 수장가이자 감평가였다. 그가 책을 구하는데 얼마나 열정적이었는가는 갖고 싶은 책을 만나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팔아서라도 구입할 정도였다는 일화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그의 14대 할아버지 익재 이제현은 고려시대 거유(巨儒)이다. 이러한 가문 탓인지 이하곤은 익재 이후 대대로 전해진 전적과 서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사천 이병연, 관아재 조영석 등과 절친했는데, 그들과의 교유를 통해 많은 전적과 서화를 확보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많은 서화작품이 이 완위각을 채우고 있었으므로 완위각은 ‘만권루’로 통칭하기도 했다. 이 완위각은 한국의 고택이 그렇듯이 사당부터 사랑채, 서고, 안채, 행랑채까지 모두 갖춘 전형적인 양반 가옥으로 꽤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주인이 기거하던 작은 사랑 외에 바깥쪽에 손님들이 기거하던 큰 사랑채가 따로 있었으니 그 규모의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무엇보다 대청이 딸린 서고 완위각도 그런 규모를 충족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완위각의 장서들은 이하곤과 그의 가문만이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젊은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면서 이 집에 들러 책을 찾아 실력을 다듬기도 하고, 주변 고을의 유생들이 모여 강론과 토의를 하면서 완위각의 책을 활용하기도 했다. 완위각은 18세기 조선 문화에 크게 기여한 도서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완위각은 근·현대 한국 역사의 질곡과 더불어 예전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이 폐허가 됐다.

일본강점기를 거치면서 쇠락의 길에 내몰리던 완위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고, 그 많던 장서들은 피난민들의 불쏘시개로 함부로 불태워지기도 했다. 다행히 아직 800여권의 책은 남아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다 진천군이 완위각의 복원에 나서고 있으니 옛 선인의 지혜를 되살릴 수 있겠다.

부디 선조의 독서에 대한 열정이 오늘로 이어지면서 이곳 완위각이 정보통신 중심의 혁신도시와 더불어 미래 지식정보 시대의 풍성한 앞날을 예견하는 온고지신의 상징이 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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