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를 기억하는 이유
맥아더를 기억하는 이유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8.23 19: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판도를 일순간에 바꿨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이 적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가까스로 버티던 대한민국을 살렸다. 이에 국군은 연합군과 함께 파죽지세로 북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노르망디상륙작전의 아이젠하워는 몰랐어도, 맥아더는 귀에 익숙하게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국민 호응이 높다. 관객 7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20일 박근혜 대통령도 관람했다. 며칠 전 인천 방문에 이은 ‘안보 행보’였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등 야당은 이 영화에 시큰둥하다. 문재인 전 더민주당 대표는 인천 맥아더 동상이 있는 곳이 민족지도자들이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했던 곳이라며 아무런 표지가 없는 걸 한탄했다. 이 영화에 대한 간접적인 불만 표시로 볼 수 있다.

또 일부에선 ‘국뽕’(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 무조건적 애국주의를 비꼬는 말) 영화로 평가 절하하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일부 진보단체는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고 나섰다. 맥아더가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간주되는 걸 못마땅해 하는 국민이 있다는 얘기다.

맥아더는 우리를 구하고, 또 위험에도 빠뜨렸다. 38선 돌파가 ‘중공군’(중국 공산주의 국가 군대라는 뜻의 예전 용어)의 참전을 불러온 건 사실이다. 그 때문에 1.4후퇴 등 우리 민족의 고통도 더욱 컸다. 그렇다고 미국·소련이 한반도 분할점령을 위해 그어 놓은 38선에서 진격을 멈춰야 했을까.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죽을둥 살둥하다가 겨우 반격에 나섰는데 38선에서 멈출 순 없었다.

중국은 대만의 장제스를 지원하는 미국이 중국까지 치고 들어올까 걱정했다. 9월 15일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10월 5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을 막고 북한을 돕는다)’ 전쟁의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10월 19일 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하는 날,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하자 중국본토 확전을 주장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를 이용해 중국 남부를 공격할 것을 제의했다. 제2전선을 만들어 중국군을 분산시켜 한국전의 부담을 줄이자는 계산이었다.

또 원자폭탄 사용도 주장했다. 중국과 소련의 전략지역을 공격, 이참에 공산주의 국가들의 전쟁수행 능력을 파괴하자는 것이다. 맥아더의 주장은 3차세계대전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미 정부는 그의 제안을 거부하고 이후 맥아더를 해임했다. 노병은 죽진 않았지만 이렇게 사라졌다.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가볍게 봤다. 미국 정치학자 스티븐 밴에버라는 38선 돌파에 대해 “전략적 오판의 대표적 케이스”라며 “미국 군사력이 중국에게 가할 수 있는 위협을 과소평가했고, 중국이 한반도에 가진 이해관계도 과소평가했다”고 말했다. 지금의 사드(THAAD) 정국에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까지 맥아더의 ‘전략적 오판’을 비판할 수 있는가. 우리 민족은 38선 돌파를 원했다. 38선은 국경선이 아니었다. 남북이 나뉜 채 살 순 없었다. 중공군의 참전이 예상되더라도 당시로선 38선에서 멈출 수 없었다.

38선 돌파가 가능하도록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건 인천상륙작전이었고, 그 작전을 세우고 지휘한 건 맥아더였다. 그래서 우리는 맥아더를 기억한다. 그의 동상이 인천에 있고,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러 가는 국민이 있는 이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