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에 갇힌 `부산행'
`터널'에 갇힌 `부산행'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8.2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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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재난영화는 왜 하필이면 꼭 지방을 무대로 하는가.

영화 <부산행>과 <터널>이 얼마 안 되는 시차를 두고 개봉해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은 탓에 굳이 스포일러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부산행>은 좀비의 습격을, <터널>은 부실공사로 인한 터널의 붕괴라는 재난을 다루고 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인간에 의한 원인제공이다.

<부산행>은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좀비의 원인으로 시사되는데, 우리가 유망한 미래 먹거리로 삼고 있는 ‘바이오’산업이 ‘유성바이오’라는 이름으로 거론된다.

지방의 방역활동을 영화의 시작으로 삼는데, 빠르게 이동하는 닫힌 공간 KTX열차 공간에 제한적으로 국한된 장소의 폐쇄성과 ‘부산’으로 상징되는 지방이 해방구로 상징되는, 그러나 여지없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지방’이 그려진다.

영화<터널> 역시 지방을 무대로 한다.

어느 신도시를 나타나지 않는 배경으로 삼고, 그곳으로 통하는 통로인 터널이 무너지면서 그 속에 갇힌 한 자동차 딜러의 사투를 그리는데 그 사투는 그저 버티는 것일 뿐, 적극적인 탈출 의지는 차단된 상태로 일관한다.

무리한 방식이 적용되는 자본주의의 탐욕이 두 재난영화 <부산행>과 <터널>에 숨어 있는 듯 적나라하다.

개미로 표현되는 일반 주식 투자자의 손실쯤은 그저 무시되는 펀드매니저의 냉혹함과 신기루의 희망으로 여겨지는 ‘바이오’산업의 위험천만함이 주식이라는 금융자본의 탐욕에 의해 저질러지는 비극은 재앙이다.

‘속도’에 매몰되는 터널은 산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더디게 가는 길 대신 산허리를 뚫고 빠름을 선택하는데 그 선택이 설계대로, 그럭저럭의 모양이라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자재의 누락이라는 부실의 속도를 더하고 있다.

그런 탐욕에는 극단의 탐욕적 이기심이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부산행>에는 KTX열차 안의 n제한적 공간에서도 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라는 잔인한 편 가르기가 있다. <터널>에는 휴대전화를 통한 신호와 FM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한 일방적 소통마저 희미해질 무렵, 생명의 존엄성이거나 인간에 대한 존중은 쉽사리 무시된다.

그 배경에는 신도시 건설 일정과 자본의 손실에 대한 우려가 욕심으로 남아 있는데, 그 배경에는 여론조사라는 민주적 병폐가 근거로 제시되면서 욕심이 단순히 개인에 의한 것만이 아님을 속절없이 드러낸다. 또 다른 빠름을 위한 또 다른 터널의 발파 강행은 자본이 인간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회적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터널>은 갇힌 공간에서의 최장기간 생존이라는 달갑지 않은 신기록을 상상하면서 병폐로 온전치 못한 사회와 권력자, 또는 기념촬영에 대해 걸쭉한 욕설로 카타르시스를 유도하나, 이 역시 불편함을 싹쓸이하기에 어림없다.

<부산행>은 다음 작품으로 비슷한 소재의 <서울역>을 예고하고 있는데, 그 영화는 실사 형식이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계획이어서 현실과 상상의 이미지 차이가 서울과 지방으로 차별되는 찜찜함이 영 개운치 않다.

하기야 이 지독한 편 가르기가 어디 서울과 지방의 차별뿐이랴. 국민과 지도자, 자치단체장에 이르기까지 내 편들기를 강요하는 세상. 처서도 지났으니 날씨만이라도 우리 편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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