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
안다는 것
  • 배경은<충북기독병원 원무과>
  • 승인 2016.08.2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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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배경은<충북기독병원 원무과>

아들의 퇴소식이 가까이 오던 어느 날 아들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왔다. 곧 만날 날을 위해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묻고 있는데 아들의 관심은 함께 올 여자 친구에게 있었다. 말의 요지는 여자 친구가 불편해할까 봐 친구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친정 엄마와 여동생도 가고 싶어 하는데 그렇다면 나도 ‘다른 가족을 부르지 않고 아들의 여자 친구와 둘이서만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운하지만 어쩌랴! 고등학교 내내 친구로 지내다가 사귄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는 아름다운 커플의 재회를 막고 싶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면서 아들의 여자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아들을 알고 있는 그녀가 그저 고마웠고 기특할 뿐이었다.

내가 아는 아들은 ‘엄마’라는 규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규정지음 안에서의 아들 또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유치하고 한정된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는지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철학적 사유로 토론했던 아름다운 커플이 있었으니 소크라테스와 그의 사랑하는 소년 테아이테토스다. 토론의 중심에서 그는 ‘지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으며 쉬지 않고 생성중 인 것(고착화 되거나, 멈추어 있지 않기에)’으로 말한다. 즉, 기억을 기억하는 순간 기억이라는 저장소에 쌓여 추억이 되는 것처럼 굳어져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식과 함께 설명이 덧붙여지는 것이 가장 완벽하고 현명한 앎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자네(테아이테토스)에 관해 옳은 인식을 지니면서 이에 덧붙여 자네에 대한 설명까지 포착하고 있다면 나는 자네를 정말 아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나는 자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네]라고 말했다. 자신의 한계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존엄을 존엄답게 인식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정의인가. 안다는 것은 방자히 판단하고, 규정지은 자신만의 틀에 가두는 정의가 아니라 정의하는 모든 것에 추가적인 설명을 할 줄 알며 계속적으로 알아 가면서 깊어지는 마음이다.

참된 인식(앎)을 사유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어느 것에도 단죄의 칼로 나누는 것을 멈출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인식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소망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숙으로 다가올 것이다.

얼마 전, 커피 만드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커피를 왜 알고 싶었냐는 물음에 손님들이 커피에 대해 물어보는데 대답이 궁색하더란다. 그래서 커피 공부를 시작했다. 급기야 지금은 제대로 된 커피 관련 책을 내고 싶다고 한다. 내색하지 않지만 커피를 알아가면서 커피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녀의 눈이 말해 준다. 고객만족을 위한 지식 정도로 시작한 커피 알기가 이제는 커피의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하고 커피와의 만남이 행복해 보이는 그녀, 그녀의 커피 알기는 사랑함의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가 아닐까.

아들은 계산 없는 순수함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 모습이 내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들을 나만의 틀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제 사람이든, 이미 정의된 것이든 안다고 규정짓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조금 더 알아 가는 것에서 깊은 기쁨을 발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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