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희<수필가>
  • 승인 2016.08.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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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은희

갑자기 빗줄기가 쏟아진다. 우산을 받쳐도 가랑이가 젖을까 신경이 쓰인다. 자연스레 물이 고이지 않은 곳으로 이리저리 살피며 걷게 된다. 바닥을 살피다 보니 군데군데 부유하는 물방울이 보인다. 물줄기를 따라 흐르지 못하고 물방울들이 바닥에 겉돌고 있다.

물방울을 톺아보니 그 속에 내가 있다. 우산을 어깨에 얹고 쪼그려 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 형상은 바로 내 모습의 축소판이다. 초점을 달리하여 다른 물방울을 바라보니 거기에도 내 형상이 보인다. 지름 일 센티미터 남짓한 투명한 물방울이 세상을 품고 있다. 그 속에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된다.

내 그늘에 갇힌 물방울은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처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더욱이 나와 함께 우산을 쓰고 있지 않은가. 뚫어지게 바라보다 한발 물러나 그의 형편을 살핀다. 아마도 저들은 여느 빗물처럼 지기지우(知己之友)와 넓은 세상으로 흘러가고 싶으리라. 하지만, 세상과 하나가 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랴. 문득 사회 초년생인 딸아이의 말이 떠오른다.

딸애는 귀가하여 나에게 자신의 일과를 조잘거린다. 직장생활은 긴장의 연속이고, 상황마다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단다. 취업 준비 시절 겪던 마음고생은 이제 끝났다고 여겼는데, 다시 시작이란다. 딸은 예전보다 강도가 열 배 이상 힘겹다며 엄살을 부린다. 결국, 기존 자아를 부수는 희생과 다른 너를 품어야만 한다.

상념에서 벗어나 바닥에 겉도는 물방울에 시선을 둔다. 순간 놀라운 광경을 맞는다. 방금 투명한 물방울이 터진 것이다. 그것도 같은 종족인 새로운 빗방울의 도전이다. 서로 온몸으로 부딪더니 사정없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이전의 형체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물줄기에 합류하여 유유히 흘러간다. 결국, 타자의 도움으로 물방울의 형체는 깨지고 ‘물’이란 세상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우리는 깨지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깨야만 진짜 인생을 살 수 있다. 딸애의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지닌 사고의 틀은 깨트리고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어디 그뿐이랴. 어떤 상황에서든 나 혼자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발상도 깨야만 한다. 상생을 원한다면, 밥그릇 싸움도 그만 하자. 무엇보다 재물의 힘으로 ‘갑질’을 일삼는 자에 깸의 철학을 들려주고 싶다. 또한,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지낸다. 문득, “스스로 껍질을 깨트리면 병아리고, 누군가 껍질을 깨주면 프라이야”라는 시가 떠오른다. 병아리든 프라이든 깨주고 깨트리는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살기가 어려워 삶을 포기하는 이가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굳어진 사고와 생각을 고쳐먹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절망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잠시 ‘깸’의 진리 안에서 쉬어가길 원한다.

부유하던 물방울이 새로운 세계로 유유히 흐른다. 길 위에서 ‘깸’으로 하나가 되는 법을 터득한다. 빗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깨치는 우(雨)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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