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
구멍가게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6.08.1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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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수필가>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구멍가게를 했다. 마을 초입에는 작은 시골동네치고 제법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그 한켠에 자리한 때문인지 우리 가게는 동네 사람들의 쉼터가 되곤 했다.

그때 나는 꽤나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친구들 생각에 사탕이랑 얼음과자도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구멍가게’ 딸이었던 나는 마음대로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한다며 자식들에게도 먹지 못하게 했다.

그런 부모님도 구멍일 때가 있었다. 동네 품앗이를 가는 날이면 우리 형제 중에 막내였던 내가 가게를 보곤 했다. 그때 내가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은 학교에서 신청해서 먹던 삼각우유였다.

그런데 우리 집 형편으로 우유를 먹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가게를 볼 때마다 백 원짜리 동전을 금고에서 조금씩 꺼내어 모아 두는 일이었다. 다행히 부모님께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학교에서 당당히 우유를 신청해서 먹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부모님도 알고 눈감아 주셨지 싶다.

‘구멍가게’는 인정의 가게였다. 돈이 없어도 좋았다. 장부에 ‘○○네’라고 적어 놓고 가면 되었다. 돈을 갚는 것도 기한이 없다. 품값이 들어오는 날이 외상값을 갚는 날이었기에 보채는 법도 없었다. 겨울이면 동네 남정네들이 모여 놀음판을 벌이는 날이면 그 집 어린 딸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와 외상으로 막걸리를 받아 간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큰 막걸리 항아리를 저으실 때면 동굴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 동굴 같던 항아리에서 바가지로 막걸리를 푸시던 어머니는 아이가 안쓰러워 한 되 박 줄 것을 반 되는 더 주고 만다. 그 딸은 무거워 들고 갈 생각에 울상인데도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시는지 어여 가라며 등을 토닥여 주시곤 하셨다.

지금은 시골 마을의 사람들은 읍내의 대형마트로 물건을 사러 나온다. 집집마다 차가 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시골동네와 읍내의 골목마다 있던 작은 구멍가게들은 점점 그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어 졌다.

구멍가게가 사라진 읍내의 골목에는 24시간 운영이 되는 편의점이 들어서 불을 밝히고 있다. 인심 좋게 생긴 동네 어른이 지키고 있던 구멍가게와는 다르게 어린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편의점을 지킨다. 작은 골목마다 들어선 편의점은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사업의 결과이다. 대기업의 이기심으로 인해 세상의 온정이 점점 메말라 가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구멍’은 참 정겨운 말이다. 말 자체가 얼마나 허술하고 빈틈이 많아 보이는가. 예전에 나는 누군가에게 빈틈이 없어 보이는 단단한 사람이길 원했다.

하지만 내 부모가 그랬듯 나 또한 나이가 듦에 따라 몸도 마음도 구멍이 많아지고 있다. 점점 동네 의원의 단골이 되었고, 지인과 약속을 잊기도 하고, 사람의 이름을 잊어 온종일 끙끙대는 날도 허다하다. 세월의 강물을 어찌 거스를 수 있을까 만은 왠지 서글퍼지는 요즘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구멍이 많아지는 동시에 그 구멍마다 지난한 삶을 살다 가신 내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나의 지나간 날들에 대한 아쉬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뀌어 채워지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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