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과 역사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광복절과 역사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8.16 1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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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제71주년 광복절 국경일 내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이 뇌리에 맴돌며 나를 괴롭혔다.

‘프리하의 봄’과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바치는 오마주라는 찬사는 결코 가볍지 않고 가벼울 수도 없는데, 역사적 사실조차 틀려버린 광복절 경축사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허둥대는 극단의 경박함으로 우리가 매도되 수도 있겠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을 전제로 쿤데라는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고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해석한다.

덧붙여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일회성은 가벼움이며, 그러나 이 대립이 옮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가치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필연과 우연도 마찬가지여서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직면하며, 과연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화두를 던진다. 모든 사건은 전부 단 한 번뿐인 까닭이며,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삶과 한 국가,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는 해석은 그 자체가 심오하며 무겁고 어렵기 그지없다.

그날 참외의 고장 성주 주민 940여명은 8.15 삭발식을 했고,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규탄과 강제 징용 유가족 집회가 이어지면서 광복절 경축사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현상이 숨겨지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이만큼이나 서로 다른 역사에 대한 견해와 역사를 보는 관점과 시각의 차이가 너무도 다른 상태에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게 된 것인가.

역사에 대한 지식의 부족과 분별없음에서 비롯된 대중 연예인에 대한 비판과 질타는 당연한 것이고,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틀려버린 역사에 대한 공식석상의 언급, 이 두 가지에 대한 국민의 생각이 서로 달라질 수 있음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불공정 게임이 아닌가.

어이없게도 성주를 고립하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목격된다. 외부세력 운운하는 의도적 분리는 여전히 유효한 듯한데, 이를 시도하는 것은 주로 지배집단이다. 이른바 ‘순수’하거나 그렇지 않은 ‘불순’으로 양분하는 대립구도에 대한 경로 의존성에 대한 지배세력의 집착을 우리는 이미 여러 경우에서 목격하고 있다.

‘느린 민주주의’로 포장되고 있는 이화여대의 학내대립은 자발적인 외부 세력과의 단절일 터이고, 세월호유가족의 ‘순수’와 그렇지 않은 세력의 선별적 대립 구도를 비롯해 최근의 메길리아 논쟁에 이르기까지 분열과 갈등, 대립의 ‘골짜기’는 올림픽 축구 4강 좌절과 다를 바 없다.

내부는 순수하고 외부는 불순하다는 이분법은 결국 고립의 심화를 통한 확산성의 차단이라는 노림수가 노골적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해 불가피해진 경우든, 빗장을 닫아건 단절의 상태의 내부는 자가발전적인 학습을 통해 반감의 학습 효과가 더 커질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알아차리고 있다.

그리고 반감을 가진 내부의 경우 학습의 점들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멈추지 못할 경우 선으로 이어질 수 있음도 경계해야 할 일인데. 혹시라도 이런 역사적 흐름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언제쯤 우리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대신 ‘참아야 하는 역사의 묵직함’을 자랑할 수 있을까. 설현과 티파니는 사과라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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