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에 나올법한 아카시
영화 ‘암살’에 나올법한 아카시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8.1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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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아카시 모토지로는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악명을 떨쳤던 일제 헌병대장이다. 지난 12일 독립기념관이 광복 71돌을 맞아 그의 친필편지를 공개했다. 이틀 후엔 지리산 일대서 치열하게 의병활동을 펼쳤던 경남창의대 박동의 대장의 활약상이 상세하게 전해졌다. 당시 박 대장에게 아카시는 원수 같은 적(敵)이었다.

아카시는 두 번에 걸쳐 한국서 근무했다. 공개된 편지는 첫번째 임기(1907년 10월~1909년 8월)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후임자에게 남긴 당부의 글이다. 이 글에 “전남에서 적도들의 상황은 여전할 뿐”이란 내용이 있다. 아카시에게 우리 의병은 ‘적도’였다. 때는 남쪽 의병을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남한대토벌작전’이 벌어지기 직전이다.

1907년 7월 군대 해산과 함께 시작된 의병활동은 이듬해부터 험준한 지리산을 배경으로 영남, 호남 의병이 투쟁을 벌였다. 아카시가 말한 ‘전남의 적도’는 이들 지리산 의병을 말한 것이다.

경남창의대는 1908년 3월 12일 지리산 부근 산청에서 일본인 가옥을 불태웠으며 같은 달 26일 밤 산청주재소를 습격하고 건물을 불태웠다. 4월에는 산청 단성읍내 주재소를 습격해 건물과 서류를 불태웠고, 산청군 두량곡과 대원사 부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십 차례 교전해 큰 피해를 줬다. 일제 기록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박동의 대장은 그해 10월 산청에서 일본군 습격을 받아 체포돼 순국했다. 경술국치 후에도 존속한 경남창의대는 전국 의병으로 구성된 13도 창의군의 일원이었다. 13도 창의군 군사장(軍師長)은 허위였다. 허위는 후일 체포돼 아카시의 심문을 받고 처형됐다.

13도 창의군은 의욕적으로 서울진공작전을 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이 1908년 1월 말 사망하면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인영이 “어버이에 대한 불효는 나라에 대한 불충이다. 나는 3년상을 치른 뒤 다시 의병을 일으켜 국가를 구하겠다”며 모든 일을 허위에게 맡기고 고향 문경으로 내려갔다. 동대문 밖 30리까지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진격했던 총대장의 사상적 한계였다. 결국 이인영도 아카시가 한국에 있던 1909년 6월 일본군 헌병에 체포돼 그해 순국했다. 박동의, 허위, 이인영 등 의병장 모두 아카시의 헌병대장 시절 순국했다.

후쿠오카 출신인 아카시는 정치공작 전문가였다. 1901년 1월 프랑스 공사관 무관을 거쳐 1902년 8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러시아 공사관 무관으로 전임됐다. 이때부터 러시아 내부를 분열시켜 러일전쟁 수행을 어렵게 만들고자 공작을 개시했다. 그는 영국 첩보원이 보내온 뤼순요새 도면을 확보해 일본군의 뤼순점령(1904년 12월)을 도왔다. 또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을 지원, 제정러시아를 뒤흔들었다. 러시아혁명의 도화선이 된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사건에도 개입했다. 스위스 망명 중인 레닌에게까지 접근하고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 소설가 막심 고리키와도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그의 정치공작술은 조선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이 된 아카시는 민족운동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105인사건을 조작했다.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철교 개통식에 참석하러 기차로 신의주에 갈 때 선천역에 잠시 하차하는 틈을 타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건이다. 민족지도자를 무려 600명이나 검거했다.

아카시는 이같이 의병탄압, 무단통치 집단의 괴수였다. 영화 ‘암살’에서 표적으로 나올 법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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