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대하여
분노에 대하여
  • 김기원<시인·문화평론가>
  • 승인 2016.08.10 2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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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시인·문화평론가>

분노! 말만 들어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아니 가슴에 뜨거운 전율을 느낍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했던 분노와, 분노하지 말아야 할 때 분노하고만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분노는 희로애락(喜怒哀樂)중 怒에 해당하는 인간의 감정 중 하나입니다.

분개하여 몹시 성을 내거나 화를 냄을 이릅니다. 분노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분노와 타인에 대한 분노, 공중에 대한 분노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분노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타납니다.

우유부단하여 좋은 기회를 놓칠 때, 실수와 부주의로 일을 그르쳤을 때, 이겨야 할 싸움에 졌을 때, 양심에 반한 말과 행위를 했을 때,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을 때,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갈 때, 불의를 보고도 항거하지 못할 때, 존재감을 상실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자신에 대한 분노는 자칫하면 우울증도 앓고 목숨까지 끊기도 하는 재앙이 됩니다만 자신을 성숙하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합니다.

타인에 대한 분노는 자신의 이익이나 존엄에 심대한 침해를 받을 때 나타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ㆍ모함ㆍ사기를 당했을 때, 누군가에게 심한 모욕과 굴욕을 당했을 때, 승진누락 등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분노로 치를 떱니다.

홧김에 방화하고, 보복운전하고, 보복살인하는 것도, 화장실 여성 살인사건 같은 묻지 마 살인사건들도 모두 타인에 대한 분노가 빚은 참극입니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분노는 적개심과 응징을 낳고,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공중에 대한 분노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할 때 나타나는 공분을 이릅니다.

정치가 개판일 때, 공직자들이 부정부패와 비리를 저지를 때, 이익집단들이 과도한 시위나 터무니없는 주장을 할 때,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협박할 때,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때, 중국이나 미국이 우리나라를 얕잡아볼 때,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자살폭탄테러가 자행될 때 형언할 수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런 공분에 침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촛불을 들고 항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분에 침묵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며, 촛불을 드는 사회는 살아있는 사회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들끓는 분노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정치권과 공직사회의 부정부패와 자본과 권력이 결탁한 한탕주의가 만연해 있고, 개인주의와 몰인간화의 심화로 사람들의 분노조절장치에 고장이 생겨서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건·사고들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어서입니다.

국민은 정치인과 공직자를 믿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으니 오늘은 또 어디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까 전전긍긍하며 삽니다. 우울하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살인적 폭염이야 에어컨을 틀거나 시원한 계곡으로 피서를 가면 해결되지만 우리 사회의 들끓는 분노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공직사회의 부정부패와 사회 전반에 만연된 비리를 척결하고, 분노조절 장치가 고장 난 사람들의 분노의 질주를 막아내지 못하면 미래가 없습니다.

저에게도 분명 분기탱천하던 질풍노도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새 분기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오그라들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몰염치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분노는 하면 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하면 할수록 중독되어 분노의 수렁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됩니다. 자신을 찌르는 비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의 미학은 용서에 있습니다.

선인들이 이르기를 화가 나면 100을 세라 했습니다. 분노로 인한 파괴와 불행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내어주라 했습니다.

분노 과잉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말씀입니다.

그대도 분노가 치밀 때 미소 짓는 멋진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시인·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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