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바람아
바람아, 바람아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6.08.09 2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황소바람이 빼꼼 열어 놓은 대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온다. 마당을 가로질러 빨랫줄을 붙들고 늘어지더니 순식간에 쥐똥나무가지를 흔들고는 달아난다. 엉겁결에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가 땅으로 나뒹굴고 고쟁이가 만국기처럼 휘날린다. 옆에 있던 이가 혀를 찬다.

“원, 참- 바람도?.”

나도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 거든다.

“원 개구쟁이 같은 녀석….”

천방지축 골목대장이 수월찮은 제 졸개들 거느리고 널어놓은 먹거리 냅다 들고 달아나던 모습 같아서 웃는다. 바람 소리 내며 동네를 누비던 골목대장과 졸개들, 세월 저 너머에 파편처럼 널려 있는 한 조각의 기억이다.

저만치 달아나던 녀석이 들녘에도 누비고 다닌다. 고개 숙인 나락 사이로, 고소한 들깻잎 사이로, 푸른 기 덜 가신 늙은 호박 잔등으로 설레발치며 돌아다닌다. 덜 여문 곡식이 가을볕을 놓칠까 봐 천둥벌거숭이로 설치고 다니며 밭두렁 논두렁에서 소리소리 지른다. 지천에 널린 가을볕을 데리고 서둘러 숲으로도 달려갈 기세다.

“원 제 할 일도 아닌 성 싶은데 오지랖도 넓다.” 치맛자락 건들던 꽃 바람이 여름을 타더니 가을이 들며 철들었나 보다.

왕숙이 아버지 가슴에 들었던 바람은 무슨 바람이었을까. 두서없는 왜바람인가, 갑자기 들이닥친 벼락바람인가. 역마살이 끼어서 아내를 독수공방시키더니, 그것도 과분타고 딴살림 차려나갔다. 바람에 걸려 넘어지더니 온 인생을 바람이 되어 떠돌았다. 제 버릇 남 못 주고 철철이 도진 역마살에 평생을 떠돌다 칠십 중반에 오갈 데가 없다.

곰살맞은 지어미의 눈빛이 그립고, 새끼들의 살뜰한 한마디와 손자의 재롱이 그립다. 가솔들 둘러앉아 저녁상 받는 이씨가 부럽고, 자식 장가보낸다고 청첩장 돌리는 박씨가 부러워 애먼 술잔만 비운다.

왕숙이 아버지는 객기 부린 죗값으로 혼자 산다. 바람 먹고 구름 똥 싸던 그 양반을 일러 풍객이라 한다. 볼 때마다“말똥 싸지.” 말하고 싶은데 짐짓 반가운 듯 인사를 한다. 서글픈 신세 더 무참해질까 싶어서다.

어머니의 세월을 보았기에, 아버지의 부재를 뼈저리게 겪어냈기에 자식들의 마음은 쉬이 열리질 않는다. 어떤 이는 저를 있게 한 핏줄인데 무정하다 말하고, 노인들은 불쌍놈 같은 자식들이라 나무라지만 뿌리 깊은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는다. 서늘한 자식들의 눈빛에 오금이 저려도, 더 늦기 전에 가엾은 왕숙이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고픈 바람에 가슴이 탄다. 오늘도 조급한 마음은 조강지처가 있는 대문 앞에 하염없이 서성인다.

왕숙이 어머니도 지아비 그늘에서 자식 낳고 알콩달콩 살아본 겨우 몇 해가 보석처럼 가슴에 박혔을까. 한때는 눈도 마음도 동구 밖에 두었다. 낮에는 낯짝이 부끄러워 오밤중에라도

“이녁- 나요.”

슬그머니 대문 열고 들어설까 싶어 걸어놓은 문고리에 마음도 걸어두었다. 눈물 밥을, 지새운 밤을 어찌 손으로 꼽을까. 죽어 거적때기에 싸여 와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작심했었다. 그 아내가 요즘 들어 속이 제 속이 아니다. 꼴이 가엾다 눈길을 준다. 이제는 분한 마음도 사그라지고 미운 정도 정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은데, 자식들의 노발대발이 무서워 눈치만 살핀다. 날건달 김씨도 늙으니 자식들이 거두었다는데?.

혹, 철면피한 면상으로 오늘은 들이닥치려나, 지어미의 미련이 칼바람 부는 대문에 머물고 있다. 산으로 들로 오지랖 넓어 휘젓고 다녀도 좋다. 아서라, 부디 억장 무너질 벼락바람 소리로 사람의 가슴엘랑은 찾아들지 말거라.

바람아, 바람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