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슬쩍
스리슬쩍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6.08.04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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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한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합원 아파트인데 잘 빠졌다고 구경 가자고 한다. 나는 돈도 없고 생각도 없다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전화가 왔다. 실은 본인이 분양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구경이나 오라고. 정말 생각이 없다고 전화를 끊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한 것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신경이 쓰였다. 내게 세 번의 전화를 하기까지 친구는 수화기를 얼마나 여러 차례 들었다 놨을까 또 얼마나 많은 마음의 갈등을 일으켰을까를 생각하니 미안했다. 친구 얼굴도 볼 겸 구경이나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는 그 사단이 났다.

동의도 없이 아들 이름으로 덜커덕 계약을 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차 실수했구나!’하는 생각이 폭포처럼 밀려들었다. 취소할 요량으로 친구에게 전화했다. 친구는 본인은 권한이 없으니 분양 팀장에게 전화하라 한다.

전화를 받은 팀장은 단호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사무실을 찾아갔다. 계약을 취소한다고 하자 그 곱고 순하던 얼굴들이 한여름 폭풍처럼 거세게 돌변했다. 계약서에 명기돼서 돌려줄 수 없다는 둥 가계약이라도 계약서와 똑같은 효력을 지닌다는 둥. 그러는 도중 모델하우스를 구경하러 온 손님들이 몰려들자 나를 얼른 싸서 버려야 하는 휴지 말듯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한 달만 기다려 주면 어찌해주겠다고. 그래도 내가 가지 않자 짐짝 취급하며 두 주만 기다리면 어찌하든 해결해 줄 테니 돌아가라 한다.

두 주가 다 되어가는데 연락도 없다. 답답한 나는 분양사무실에 갔다. 팀장은 다른 계약자가 나타나면 그 돈을 돌려서 어찌어찌 돌려주겠다고 한다. 마침 내일 계약자가 나타날 것 같다고 한다. 해지에 필요한 서류를 갖고 오라고 했다.

다음날 서류를 들고 사무실로 갔다. 서류를 받아든 그는 계약예정자가 계약을 안 했다고 다시 다음에 연락한다며 돌아선다. 말려도 된통 말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사람으로 풀자고 생각한 나는 그냥 돌아왔다.

그리고 법무사로 일하는 지인에게 전화했다. 아들의 동의 없이 했으니 아들 편에서 내용증명서 보내고 무효소송을 하면 승산이 있단다. 그러나 그런 송사에 휘말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 돈이 없어서 당장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니 한 번 더 사람을 믿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돈을 입금 시켰으니 확인해 보라고.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부른 두 달여 간의 시비를 겪고 나서 나를 돌아본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이리라. 마당에는 어느덧 어둠이 칡넝쿨처럼 슬금슬금 발을 디밀고 있다. 살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 밭에 스리슬쩍 발 들이는 욕심을 거두며 살자고 다시 한 번 되뇌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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