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 김기원<시인·문화평론가>
  • 승인 2016.08.03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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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

슬픔 속으로 들어갑니다.

슬픔의 민낯도 보고 슬픔의 빛과 그림자를 노래하려함입니다.

슬픔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시작된 원죄의 소산입니다.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겪게 되는 아픈 감정이지요.

슬픔은 볼 수도, 셀 수도, 만질 수도, 그릴 수도 없지만,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그 무엇입니다. 공기 중에 있는 산소나 이산화탄소처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마주친 사람과 사물과 사건을 보고 어떤 이는 기뻐하고 어떤 이는 슬퍼합니다. 눈비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처럼.

슬픔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시공을 초월하는 사유의 편린입니다.

슬픔은 심하면 우울증을 유발하고 자살까지 이르게 하는 저주의 얼굴과, 인간을 더 단단하게 더 성숙하게 하는 축복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그러므로 슬픔이라고 다 같은 슬픔이 아닙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동백꽃과 목련꽃이 떨어지면, 가을하늘에 기러기 날면 까닭 없는 슬픔이 밀려오듯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 중의 하나입니다.

100년도 못사는 인간의 유한성과 딱 한번 뿐인 삶을 살다가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원초적인 슬픔도 그러하지만, 소중한 그 무엇을 상실(loss) 했을 때 오는 슬픔이 참으로 크고 아픕니다.

정들었던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원치 않는 이별을 할 때, 자신의 지위나 가치가 없어지거나 사라지게 되면 누구나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지요.

재산을 탕진하거나, 실직을 당하거나, 시험에 낙방하거나, 중병에 걸리거나, 실연을 당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가족이 갑자기 죽거나, 외롭고 쓸쓸해지면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젖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슬픔은 자식 잃은 슬픔일 겁니다.

새끼를 애타게 찾다가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몇 갈래로 끊어져 있었다는 단장(斷腸)이라는 고사처럼 평생 가슴에 묻어야할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때론 슬픔이 실망이 되고 분노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경쟁에서 뒤처지면, 존경하던 사람한테 실망하면,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하면, 주위로부터 외면당하고 따돌림 받으면 참담한 슬픔을 느끼지만, 이내 실망과 분노로 변해 복수의 칼을 갑니다.

이처럼 슬픔이 분노로 바뀌면 슬픔은 사라지고 원한만 남습니다. 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같은 슬픔인데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면 분노가 되고, 자신에게 돌리면 자학이 됩니다.

슬픔은 기쁨의 반대 감정이지만 슬픔과 기쁨이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바뀌기도 합니다.

지난 16대 대통령선거 때 노무현 후보가 보여 준 눈물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처럼 슬픔은 동정을 유발하는 반전의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슬픔은 안으로는 자신을 괴롭히고 밖으로는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원인을 제공하지만, 때론 약자가 흘리는 눈물이 공격하는 강자의 힘을 무력화시켜 약자를 살아남게 하는 약이 됩니다.

아무튼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기쁨도 느끼지 못합니다.

모든 감정이 의미가 있듯이 슬픔도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 공감하는 슬픔은 일체감을 불러옵니다. 부부가 슬픔을 공유하면 사랑이 더욱 깊어지듯이, 공감하는 따듯한 슬픔은 공동체에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함께 하면 기쁨은 배가 되듯이 슬픔도 함께 하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아니 봄눈처럼 녹습니다.

슬픔은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바람처럼 지진처럼 지나갑니다.

오늘 종일 비가 내릴지라도 내일 밝은 해가 뜨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통이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내듯, 슬픔도 그렇게 아름다운 삶의 진주를 만듭니다.

그대의 슬픔까지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시인·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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