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전설이 남아있는 구라산성
슬픈 전설이 남아있는 구라산성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7.2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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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미원과 초정을 잇는 고개를 이티봉(재)이라 부른다. 이 고개의 동쪽에 작은 성터가 있는데 흔히 구녀성으로 부르거나 구려성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구라산성이다. 이 산성은 한반도의 중심이자 한강과 금강의 분수령인 청주 인근을 확보한 신라의 북진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라산성을 쌓은 신라는 미원과 괴산 청천 일대뿐만 아니라 내수와 증평 일대까지 교통로를 확보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됐다.

구라산성은 북, 서쪽의 높은 곳과 남쪽의 낮은 계곡을 이어 성벽을 쌓았다. 성벽은 둘레 872m로 네 곳에 문터가 있다. 성벽은 이티재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곳과 북벽이 잘 남아있다. 성 안쪽의 낮은 곳에는 넓은 건물터와 우물이 있는데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 또 정상쪽에는 여러 기의 무덤이 있는데 성을 쌓다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라 한다. 그것은 남매 축성 설화로 잘 알려져 있으며 소백산맥 서쪽에 주로 남아있는 남매 축성 설화가 이곳의 민묘와 결합한 형태의 전설로 주목된다.

충북도 ‘전설지’에 소개된 축성 설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오랜 옛날 이곳에 아들 하나와 아홉 딸을 가진 홀어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 남매는 사이가 좋지 않아 항상 다투었는데 마침내 그들은 생사를 걸고 내기를 하게 되었다. 즉 딸 아홉 자매는 산에 성을 쌓는 동안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기로 했다.

이 내기에서 지는 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으로 약속하며 아홉 딸은 성을 쌓기 시작했고 아들은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내기를 시작한 지 5일이 되던 날 그 어머니가 상황을 살펴보니 아직 서울 간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없는데 딸들이 시작한 성 쌓기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아들이 내기에서 지고 죽을 것을 두려워한 어머니는 커다란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 딸들에게 먹도록 했다. 아홉 딸은 동생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이제 성은 죽 한 그릇 먹는 시간이면 능히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두 모여들어 팥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죽이 너무 뜨거워서 식히고 있는 사이에 아들은 부푼 발가락에 피를 흘리며 당도했다.

마침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내기에 패한 아홉 딸은 그들이 쌓아올린 성벽에 올라가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아홉 누이가 죽은 후 동생은 비로소 크게 뉘우치고 그곳을 떠나 개골산으로 돌아가 누이동생들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멀리 떠난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홀어머니는 먼저 죽은 영감의 무덤 앞에 아홉 딸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쓸쓸한 여생을 보내다가 끝내 아들을 만나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는 슬픈 내용이다.

남매 축성 설화는 우리나라 성곽과 관련된 가장 흔한 전설이다. 때문에 여러 갈래의 역사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 백제와 신라, 고구려와 신라, 고려와 후백제의 대립 등 역사적 사건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다. 내기로 표현된 갈등에서 마지막 승리자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삼국과 후삼국 시기의 승자인 신라와 고려가 어머니(혹은 하늘)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통일한다는 설정이다.

우리 조상은 왜 이런 슬픈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남겼을까?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 신록이 무성한 7월에 구라산성에 올라서 역사적 사실과 전설의 경계는 어디일까를 한번쯤은 사색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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