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는 것은 곧 채워짐이다
비우는 것은 곧 채워짐이다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6.07.2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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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호수의 밤은 여자마음 같다. 묵화 위에 불빛을 뿌려놓은 양 화려한 야경을 삼켜버린 호수, 찬란한 색채를 수놓은 호수에 밤이 내리기 시작하면 거긴 또 다른 세상이 하나, 둘 그려진다. 마치 시골집에 펼쳐진 병풍처럼 호수는 많은 밑그림을 그려놓았다.

어느 날부터 친정 안방 윗목에 예서의 8폭 병풍이 반쯤 펼쳐져 있었다. 팔순이 목전임에도 친정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붓글씨를 쓰신다. 책상 위에는 항상 돋보기와 중용의 책장이 펼쳐져 있다. 향이 짙게 배어 나오는 오래된 책에서 나는 종이냄새, 약간 퀴퀴하지만 누렇게 바래버린 책장엔 사람의 향기가 있었다.

예스런 모습을 간직한 붓걸이는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검버섯으로 얼룩진 팔뚝처럼 본래의 색을 잃어 낡아 있고 고리에 가지런히 걸린 붓끝도 세월만큼 닳아 있었다. 두툼하게 벽에 걸린 화선지는 그간의 아버지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돋보기를 쓰시고도 커다란 손잡이가 있는 원형 돋보기로 잔글씨가 빼곡히 박힌 책을 보신다. 고령으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콧등에 걸쳐진 돋보기 아래로 한 글자씩 붓글씨를 내려쓸 때마다 주름지고 핏기없는 손으로 연신 누르며 붓을 잡으신다. 많은 나이로 마음도 몸도 편하게 지내시면 좋으련만 그런 모습을 이해 못 할 때도 있었다. 성취감으로 흥분된 음성만큼 떨리는 손으로 펼친 병풍은 아버지마음보다 나를 옥죄게 만들었다. 아버지께서 펼친 병풍은 화조 병풍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 있었다.

고서가 있는 그곳, 아버진‘요즘 젊은것들은 그놈의 핸드폰, 콤푸터만 보고 너무 게을러, 빈 잔은 채워야 하고 빈 그릇은 담아야 요란하지 않아’ 혀끝을 차며 나이가 먹었다고, 결혼을 했다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지내는 삶은 빈 껍데기만도 못하단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중년이 넘어서면서 비로소 빈 껍데기만도 못하단 말씀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움켜쥘 줄만 알았지 나눌 줄도 모르는 미련한 자존심을 버리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비우고 내려놓으면 저절로 보이는 거 그것은 비워야 비로소 채워진다는 것이었다.

빠르게 휘몰아치는 국악의 휘모리장단처럼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을 뒤로하고 바람 소릴 따라 느린 듯, 빠른 듯, 한 박자 느린 엇 박으로 시간들을 호수 위에 띄웠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어느새 많은 나이테를 그려놓고 있었다. 중년에 들어서면서 좀 빛바랜 책장처럼 촌스럽기도 하고, 빠른 랩 장단을 따라하지 못하고 박자를 놓쳐 머뭇거리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설렌다. 아버지처럼 쉽게 단념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는 끈기가 부족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그날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상담사 과정을 단박에 등록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인간이 바둑 대결을 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제삿날 지방을 붓 펜으로 쓰고 있지만 오로지 붓글씨를 고집하시는 당신이 때대로 아이러니할 때도 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황소처럼 우직한 당신, 퇴로에 서 계시지만 내가 보기엔 배우 박상원보다도 더 출중하신 외모와 열정이 매력적이다.

달리듯 몰아가는 휘모리, 자진모리장단은 아니지만 느려도 어깨가 들썩거리고 고개가 절로 움직이는 굿거리장단 같은 중년의 여유, 조금 느리게 몰아가거나 때론 엇박자로 더디게 한 템포 쉬면서 황소걸음이지만 흐린 날보다 맑은 날이 많은 인생 2막장, 뿌리가 깊어지면 잎이 무성해질 터.

사계절 중 가을에 접어든 내 나이, 나이라는 숫자는 밀어낸다고 떨어낸다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몸에 꼭꼭 달라붙어 있는 나이, 사치가 아닌 가치로 중년의 화려한 외출은 호수에 또 다른 밑그림 하나를 그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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