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혼불 자양영당(紫陽影堂)-2
현대인의 혼불 자양영당(紫陽影堂)-2
  • 여은희<제천시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16.07.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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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여은희

의병의 총수로 추대된 유인석은 제천에 본진을 설치하고 『격고팔도열읍』과 『격고내외백관』을 전국에 포고하여 의병봉기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충청북도는 물론 인근의 강원도·경기도·경상도 지역에까지 세력을 확대, 병사를 규합하여 군세가 1만을 헤아릴 정도의 대규모 연합 부대를 결성하였다.

그리하여 제천의병은 1896년 2월 17일 관찰부 소재지인 충주성을 함락 시키고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는 등 전기의병(을미의병)사 최대의 전과로 평가되는 전적을 수립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병력으로 제천의병을 공격의 목표로 삼게 됨에 따라 제천의병은 점차 수세로 몰려 충주·제천 일대의 근거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국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의병봉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백관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그들의 반성과 궐기를 촉구하였지만, 여의치 못해 장기항전을 계획하고 유중교가 양성해 놓은 문인집단과 유능한 포수들이 있는 황해·평안도 지방으로 서행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제천의병은 결국 1896년 9월 28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 회인현 파저강변에서 의병진을 해산하게 된다.

전기의병(을미의병) 창의 10년 뒤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일어난 의병을 중기의병(을사의병)이라 하는데 제천의 정운경은 1905년 10월 6일 거의하였으나 아쉽게도 전투태세가 정비되기 전에 관군의 습격을 받아 장병들은 흩어지고 정운경을 비롯한 의진 수뇌부가 체포된다.

1907년 후기의병(정미의병)은 헤이그 특사파견으로 야기된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이후 창의한 의병을 말하는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은 전기의병(을미의병) 당시 제천의병의 동료들과 의논하면서 재기 계획을 구체화시켜 제천 의림지가 있는 영호정(映湖亭)에서 의형제인 김상태, 백남규, 권용일, 하한서, 안성해 등 제장들과 함께 결사의 항전을 다짐한다.

그 후 8월15일 제천 천남전투에서 일본군 1개 소대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이강년은 심상훈이 가져 온 고종 황제의 칙령(勅令:선생을 도체찰사로 임명)을 받아 주천에서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본격적인 호좌의진의 재출범이 시작된다.

그러나 8월23일 일본군은 천남전투 패배를 이유로 제천을 초토화 시켜 시내에 100년 이상 된 건물이 단 한 채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당시의 상황을 취재한 영국의 <데일리메일지> 종군기자였던 멕캔지의 『대한제국의 비극』이라는 책을 통하여 살펴보면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일장기(日章旗)가 햇빛에 눈부시게 펄럭이고 있었으며 일본 위병(衛兵)의 총칼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나는 언덕에서 내려와 마을로 들어가 잿더미 위를 걸었다. 나는 이제까지 그토록 심한 참사를 본 적이 결코 없었다. 여기저기에는 값나가는 물건을 찾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제 제천은 지도상에서 없는 마을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치가 떨리는 일본의 만행이 저지른 제천의 당시 참상이다.

그 후 충북·강원·경기 지역 등지에서 활약하던 이강년은 1908년 7월2일 청풍 작성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피체되어 순국하게 된다.



-적탄을 맞고- 이강년

탄환이여 자못 무정하여라.

복상뼈만 상하게 하단 말가.

심복을 꿰뚫었던들

욕됨이나 없을 것을_



체포 당시의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나타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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