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 품평
차(茶) 품평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7.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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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차 품평은 차평(茶評)을 말한다. 평가라는 말이 너무 딱딱해서 문아(文雅)하지 않다는 사람이 있다면 ‘감상’(監嘗)이란 말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감상이라고 해서 문학이나 예술 ‘감상’(鑑賞)을 떠올리면 안 된다. 작품 감상은 이미 훌륭한 것을 놓고 얼마나 좋은가를 즐기거나 아니면 칭찬일변도로 나가는 것이지만, 차 감상은 살펴 맛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어로는 ‘비평’(批評; critique)에 가깝다.

한마디로 작품 감상은 ‘좋다’만 남발하면 되는 것이지만, 차 감상은 ‘좋다’만이 아니라 모자란 점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서도 비평, 평론, 비판이 들어가면 ‘좋다’는 널널한 태도에서 ‘까는’ 팍팍한 자세가 필요한 것과 같다.

우리말에서 비판(批判)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좋지 않게 쓰여서 그렇지 차감상은 분명 비판의 영역이다. 비평해서 판단해야 한다. 그저 좋다로 끝나는 것은 주례사지 제대로 된 평론이 아닌 것처럼, 과연 어떤 차가 좋은 것일까?

차도 예술처럼 주관성이 강하게 들어간다는 점에서 실상 그 질문은 ‘나에게 어떤 차가 좋은가?’이어야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의 보편성이 늘 미학자의 과제가 되었듯이, 차맛의 보편성도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꽤나 인정된다. 기호이긴 하나, 미학 책(판단력비판)도 쓴 칸트가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공통감이 있는 것이다.

사실 차를 마실 줄 알면, 커피, 포도주 등등이 어렵지 않게 들어온다. ‘들어온다’는 뜻은 똑같이 품평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의대교수가 자기병원에서 번 돈으로 포도주 바를 차려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같이 가자고 해서, 10만원의 회비를 내고 간 적이 있다. 싸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나에게 가자고 한 것이니만큼 거절할 수도 없었다. 2시간을 달려간 그곳에는 의사들이 많았고 유한부인도 꽤나 있었다. 한 병을 딸 때마다 여럿이 있어야 많은 종류의 술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동호인 활동을 하는 것이다.

어떤 포도주가 처음 맛은 풍성해서 칭찬하다가 갑자기 뒷맛이 뚝 끊어져서 ‘이거 왜 이래?’라고 반문했더니, 내가 포도주 맛을 안다고 그때부터 나에게 맨 뒤에 남는 술을 몰아주던 그 의사가 떠오른다. 알아야 많이 얻어먹는다.

커피도 그랬다. 원리는 똑같다. 그러나 난 평소 커피는 안 마신다. 둘 다 하긴 벅차기 때문에 하나만 한다. 하와이 학회에서 커피를 내는 데 맛이 매우 좋아 그때는 홍차를 차버리고 그 커피만 먹었는데, 나중에야 알았다. 코나커피가 블루마운틴에 비해 약간 쌀 정도로 좋은 커피라는 것을. 블루마운틴이 10원이라면 코나가 9원, 그리고 나머지는 5~6원에서 놀았다. 그거 안 사왔다고 야단치던 커피집 사장님은 잘 계시는지?

나만 좋으면 되는 기호식품이지만 동호인들이 모이고 그래서 가격이 형성되는 것을 보면 일반성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바로 이런 것이 예술품의 호오를 결정하는 것 아닐까 싶다. 한국인들이 밥맛을 아는 것처럼, 세계인들은 곳곳에서 자신들의 음식을 ‘함께’ 품평한다. 나는 믿는다. 세계화란 자본주의 앞에서 발가벗는 것이 아니라, 세계인의 문화(맛) 그 수준까지 ‘더불어’ 가는 것이 세계화라고.

양놈들이 밥에 뜸을 들여 먹지 않고 끓여 먹기에 ‘두유 노우 뜸?’이라면서 맛있는 밥을 지어놓았더니 이 녀석 하는 말이 너무 퍼졌단다. 덕분에 나도 배웠다. 베고 자던 빵에 달라붙어 있던 생호밀이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다는 것을. 그들은 생쌀 맛을 즐겼다. 어려서 생쌀 먹다 혼난 기억만 사라지면 나도 뜸 들이지 않고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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