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혼불 자양영당(紫陽影堂)
현대인의 혼불 자양영당(紫陽影堂)
  • 여은희<제천시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16.07.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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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여은희

박은식선생은 ‘국가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 일어나 조직하는 자위군, 즉 조정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군이다.’ 라고 의병을 정의했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 있지만 구한말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한목숨 바쳐 풍운을 막아보고자 분연히 일어섰던 “제천의병”의 넋이 흐르는 곳, 자양영당을 통하여 제천의병에 다가가 보자.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때에도 굳게 닫혀 있던 조선의 문이 1875년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체결된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열리게 되어 개화의 물결이 밀물처럼 밀려오게 된다.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제자 유중교(省齋 柳重敎)가 1889년 춘천에서 제천 봉양 장담마을로 옮겨와 창주정사를 세웠는데, 이것이 자양영당의 시발점으로 화서학파의 문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된다.

유중교는 선비들을 모아 강학(講學)활동을 하게 되는데 제자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게 되었고 스승의 법에 따라 열흘마다 집중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지속했다. 거의 종교적 의례처럼 정비된 학습 모임은 제자들을 결속시키기에 충분했다.

1893년 유중교가 사망하고 화서학파의 존화양이론을 철저히 계승한 유인석이 1895년 장담으로 이주해 옴으로서 일대에 화서학파의 인맥을 더욱 두텁게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화서학파의 문인 및 그 추종 세력은 개화파 관료집단에 의한 갑오변란과 을미 변복령의 실시 등을 민족문화가 파괴되는 위기상태로 인식, 1895년 5월 15일에 제천의 유인석 거처인 장담서사에서 덕망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각각 자리를 정하고 앉아 나이 많고 어진자를 공경하며 법도에 맞도록 술잔을 돌리며 마시는 화합과 친목 도모의 음주예교(飮酒禮敎)인 향음례를 거행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해 10월 유인석의 모친상에 즈음하여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유인석에 의해 처변삼사(①거의소청(擧義掃淸) - 창의하여 왜적을 소탕하자는 안. ②거이수지(去而守之) - 일본의 침략을 받는 고국을 버리고 해외에 망명하여 대의(大義)나마 지키려는 안. ③자정치명(自靖致命) - 금수로 변하는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절조를 지키다 목숨을 버리려는 안)가 제시되었다.

이에 따라 1896년 1월 12일(양력) 이춘영, 안승우, 이범직 등은 거의 방도를 택해 지평의진을 결성하게 되고 1896년 1월 28일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하는 호좌의진(제천의병)이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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