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촌
이웃사촌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07.17 17: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일박이일의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관광버스 출발 시각에 맞추려면 아침 7시 30분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그런데 아침에 복숭아밭 소독을 하고 떠나야 한다. 새벽 네 시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일어나 밭으로 가 소독을 시작한다.

이 작업을 할 때 조심스러운 곳이 있다. 우리 과수원 아래쪽 땅은 한쪽이 대각선으로 줄어드는 모양이다. 소독할 때 나는 그 지점에서 늘 긴장하고는 한다. 다음 이랑을 주기 위해 회전할 때 쇠파이프 한 개가 닿을 듯 아슬아슬하기 때문이다.

신나게 소독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그 지점에 이르렀다. 회전할 때 한 번에 돌지 말고 한 번 후진했다가 두 번 만에 도는 것이 안전하다. 그러나 나는 한 번에 회전하는 쪽으로 선택하고 만다.

‘내가 늦어서 남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돼. 안쪽으로 바짝 붙이면 한 번에 돌 수 있을 거야.’

방제기 꽁무니를 바라보며 ‘멈춰!’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아뿔싸! 일이 나고 만다. 방제기 꽁무니 오른쪽이 쇠파이프에 닿은 것이다. 늦었지만 천천히 후진을 시도한다.

그러나 방제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내려서 확인해본다. 후진하면서 노즐 부분의 홈에 쇠파이프가 끼어버린 것이다. 저 홈에서 파이프를 빼내지 못한다면 방제기는 결코 움직이지 못하리라. 그러나 저 육중한 시설 중 한 개의 파이프, 삼손이 온다면 몰라도 저걸 어떻게 빼낸단 말인가. 핸드폰을 꺼내 현재 시각을 확인한다. 5시 15분이다.

이 새벽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가. 그냥 혼자 해 보자. 운반기를 끌고 와 밧줄을 매고 당겨보지만 땀만 나지 역부족이다. 다시 시계를 본다. 5시 35분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염치도 팽개치고 예의도 몰라라 해야 할 시간이다. 누구에게 이 피해를 줄지 그 대상을 정하는 일만 남았다.

기계를 잘 알고, 힘도 좋으며, 무례한 부탁도 들어줄 사람이 누굴까. 기계에 이상이 있을 때마다 불러대고는 하던 이장님. 이 시간에까지 부르자니 참으로 내가 너무 몰염치한 것 같다.

그렇다면 미리 아빠를 불러보자. 미리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전화해 본다. 신새벽 전화에 너무도 놀라는 목소리지만 어쩌겠는가. 사정 이야기를 해 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수원 입구 쪽에서 나는 웅장한 기계 소리…. 미리 아빠가 용감한 지원군의 위용으로 방제기를 몰고 나타났다.

미리 아빠가 파이프의 연결 부위를 풀고 밧줄로 매달아 당기자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파이프가 천천히 빠져나온다. 방제기를 한 번 가동해 약이 잘 분사되는 것까지 꼼꼼히 확인한다. 그러고도 이것저것 조언해 준 뒤 희붐한 여명을 가르며 가는 이웃의 뒷모습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다. 덕분에 소독도 마무리할 수 있고, 버스 출발 시각에도 늦지 않게 되었다. 이웃이 떠난 과수원에 잔영처럼 남은 온기를 체감하며 소독하는데 가슴이 뜨끈하더니 내 눈에서 찔끔 눈물이 나온다.

이웃사촌의 마음 같은 둥근 해가 떠오를 때 나는 벅찬 마음으로 과수원을 나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