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사다
세월을 사다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6.07.14 2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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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맷돌을 사러 가기로 했다. 충주시 앙성면에 가면 어처구니가 멀쩡한 맷돌들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가게에는 옛날 물건들이 가득했다. 먹이를 포획하러 온 사냥꾼마냥 물건들 사이사이를 숨죽이며 걸었다. 그러나 마땅한 맷돌은 없었다. 인근에서 냉면으로 허기를 달래고 되돌아가려는 순간, 나의 눈에 고 미술품 및 생활용품 경매장이 들어왔다. 혹시 맷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경매장에 발을 들였다.

그곳에는 시간을 잊은 물건들이 즐비했다. 경매사가 둥그런 탁자위에 세월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돌린다. 경매사는 달빛처럼 은은한 추리로 물건들의 사연을 읽어 내고 있었다. 탁자위에 올려진 물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내보이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 항아리는 오른쪽 아래에 유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영인본입니다. 자 시작합니다. 만원부터입니다.” 물건들이 알몸을 선보이며 낯선 사람들에게 그들의 내력이 탈탈 털리고 있었다. 물건들은 말이 없었고 그 위를 부유하는 먼지들만 벌거벗은 몸을 토닥토닥 덮어주고 있었다.

쇠절구, 벼루. 소쿠리. 병풍, 연적, 지게, 양철 다라. 시간을 통과해온 물건들을 바라본다. 물건들은 속속 그 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내 것이다 싶으면 바로 손을 들어 의향을 표시해야 했다. 한 시간여를 판이 돌아가는 폼을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순간, 둥그런 탁자위에 올라온 검은 벼루가 내 동공을 크게 만들었다. 바람총을 훅 불 듯 나의 손이 훅 올라갔다. 붓글씨도 쓸 줄도 모르는 나는 왜 벼루에 눈길이 갔을까. 도시락통처럼 네모진 까만 벼루였다. 고 물건을 알지 못하는 나는 그것의 정확한 연대를 알 수 는 없었다. 단지 세월의 때가 묻은 물건이라는 것밖에. 어쩌면 오래된, 어쩌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 일수도 있다. 이만원에 내게 낙찰된 세월. 그 세월의 깊이를 생각하며 아득한 상념에 젖는다.

벼루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한 어여쁜 아가씨 툇마루에 앉아 있다. 고운 한복을 입고 까만 벼루에 먹을 갈아 저무는 황혼을 바라보며 난을 치고 있다. 눈을 한 번 더 감는다. 이번에는 하얀 교복 차림의 소년이 벼루에 먹을 찍어 붓글씨를 쓰고 있다. 뚜껑을 닫는다. 그녀와 소년은 오간데 없고 낡은 벼루만이 가슴 먹먹하게 앉아있다.

단돈 이만원에 이런 아련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준 시간이 고맙다. 내게 잠시나마 분주한 일상을 잊고 지난 시간의 향기를 느끼게 해준 벼루가 대견하다. 돌아오는 길 황혼처럼 물들어가는 그녀의 불그레한 볼이, 까까머리 소년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노을 속에서 자꾸만 날 내려다보는 듯하다. 돌아보며 살라고. 사는 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리는 거대한 시간의 숲에 떠다니는 작은 점일 뿐이라고. 오늘도 언젠간 세월 속에 묻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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