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강경진압에 조용한 침묵 대응 … 선진집회문화 모범
정부 강경진압에 조용한 침묵 대응 … 선진집회문화 모범
  • 하성진 기자
  • 승인 2016.07.1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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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외신들 찬사 쏟아진 민주화시위 `우산혁명', 홍콩을 배우다

中 전국인민대표대회 2017 홍콩 행정장관 선거제 개편 발표

후보조건 반발 학생주도 시위… `1국 2체제 보장' 시민도 합류

센트럴 점거로 도시기능 마비… 최루탄 살포 우산으로 막아내
▲ 1997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홍콩이 반환된 이후 중국정부의 행정장관 선출 문제에 홍콩 국민이 반발. 2014년 9월 민주화 시위 '우산혁명'이 시작된 센트럴(왼쪽)과 2014년 9월 센트럴에서 시작된 '우산혁명'이 이어졌던 홍콩 중심가.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에 반환돼 홍콩특별행정구가 처음 수립됐다.

매년 7월 1일이면 홍콩 시민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이날을 기념한다. 한쪽은 식민지 반환으로 중국의 주권 회복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고, 다른 한쪽은 중국의 홍콩 자치권 훼손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인다.

홍콩은 2047년 6월 30일까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고도의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다.

2014년 중국 정부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제를 새롭게 개편한다고 발표했다.

행정장관 후보조건을 친중국계 인사 1200명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의 과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이 홍콩인들의 반발을 샀다.

그해 9월 28일 홍콩 행정장관의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 주도로 시작된 시위는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분노한 시민이 합류하면서 하루 시위 참가자가 10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1997년 주권 반환 이후 최대 규모로 진행된 시위 여파로 은행과 학교가 일시 휴업하고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됐다.

한때 홍콩정부청사가 폐쇄되기도 했다.

당시 시위는 정부와 입법원이 위치한 애드미럴티(金鐘)와 인접한 금융 중심가 센트럴(中環)을 점거하며 도시 기능이 마비됐다.

홍콩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가스를 살포하자 이를 노란색 우산으로 막아냈다.

홍콩의 민주화 시위, ‘우산혁명(Umbrella Revolution)’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배경이다.

수만명의 시민을 거리로 끌어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홍콩 정부와 중앙 정부가 시종일관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 시위는 12월 16일, 79일 만에 막을 내렸지만 민주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진전시켰고 중·고교생 대학생 등 청년이 시위의 주축이 된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시위가 끝난 지 1년 6개월여 만인 지난 5월 9일 취재진은 홍콩을 찾았다. 시위의 첫 도화선이 된 센트럴역 인근 식당에서 일하는 야이웨친씨(54·여)는 당시 시위에 참여했을 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행정장관 선거와 관련해 난 알고 있는 것이 없었어요. 연일 매스컴을 통해 소식을 접하는데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쐈다는 사실을 알았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운동화로 갈아신고 거리로 향했습니다.”

당시 시위대는 당국의 해산 명령을 거부한 채 시위 사흘째 밤 센트럴과 홍콩 섬 서부지역, 주룽(九龍) 반도의 몽콕(旺角) 등의 주요 도로를 점거한 채 철야농성을 이어갔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중고교생과 교사, 일반 직장인들까지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섰다.

최루탄을 앞세운 강제 해산 시도가 더 많은 홍콩 시민을 시위현장으로 불러낸 것이다.

택시기사 리오첸씨(42)도 생업을 포기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고 한다.

중국본토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시위대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게 이유였다.

첸씨는 “모든 홍콩시민은 중국정부의 결정에 크게 분노했다. 생업에 다소 지장이 있더라도 당시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중국본토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1국 2체제를 확실히 보장받아야 하는 까닭에서다”라고 말했다.

첸씨와 마찬가지로 당시 민심의 바로미터인 택시기사들도 시위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불법 시위가 난무하는 한국 국민의 눈에는 홍콩 시위가 어떻게 비쳤을까?

홍콩에서 만난 한인 김정진씨(52·여)는 “내·외국인이 보기에 폭력 없이 평화를 최우선한 집회로 기억한다. 퇴근 후 직장인들이 거리로 나와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조용히 집회를 이어갔다”며 “이 때문에 저녁부터 새벽까지가 주된 집회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홍콩 최대 번화가인 센트럴에서 시위가 계속되고 시민들이 모여들면서 대중교통은 마비가 되고 관광에까지 타격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시민이 필요한 집회로 인식했다”며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전혀 없었다. 정부의 진압에도 조용히 침묵으로 대응했다. 한인으로서 동조해주고 싶을 정도로 선진 집회 문화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김씨는 “현재도 홍콩 곳곳에서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중국정부에서 같은 행태를 반복하면 우산혁명이 곧바로 재현될 수 있다는 묵언의 경고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주권반환일인 7월 1일 시민 수천∼수십만명이 참여하는 민주화 요구 행진이 진행됐다.

▲ (사진 오른쪽)2014년 10월 홍콩 정부청사 인근 거리에서 비옷을 입은 한 시민이 홍콩 민주화시위의 상징인 우산을 들고 서 있다. (왼쪽)홍콩 주룽(九龍) 반도 몽콕(旺角) 지역에서 시위대가 점거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시위의 상징이 된 노란색 우산에 민주주의와 연관된 문구들이 적혀 있다. /뉴시스

‘우산혁명’ 때 유행했던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나요(試問誰還未覺醒)’라는 노래를 부르며 집회 열기를 북돋웠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영국령 홍콩 깃발을 든 시민도 눈에 띄었다. 홍콩인의 반(反) 중국 정서가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찰은 신고하지 않은 불법 집회라며 해산을 촉구했지만 시위대가 거부하자 후추 스프레이를 발사해 해산시켰다.

/하성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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