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기에 대하여
거시기에 대하여
  • 김기원<시인·문화평론가>
  • 승인 2016.07.13 2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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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

‘채식주의자’가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3대 문학상이라 불리는 맨부커인터내셔널상 작품으로 선정되어 저자 한강이 세계3대 문학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적 정한과 시적인 언어로 빚은 한강의 작품을 번역가가 유럽인 정서에 맞게 잘 번역해 주었기에 가능했던 수상이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맨부커상은 이처럼 번역의 중요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고, 좋은 번역가를 만나면 공쿠르상은 물론 노벨문학상도 얼마든지 수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각설하고 호남인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거시기’란 말이 있습니다.

거시기하면 대충 알아듣기는 하지만 거시기라는 말의 효용성이 워낙 크고 다양해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앞 뒤 말과 행간의 의미를 살펴야 알아들을 수 있는 해학적인 ‘거시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훌륭한 번역가일지라도 작품 속의 수많은 ‘거시기’를 한국인이 느끼는 수준으로 맛깔스럽게 번역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사고체계가 다른 영어권이나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권 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번역하려면 엄청난 내공이 있어야 할겁니다.

거시기의 사전적 의미는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

하려는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가 거북할 때 쓰는 군소리를 일컫는 감탄사이기도 하지요.

‘거시기’는 전라도 특유의 억양으로 질펀하게 써야 제 맛이 납니다.

그래서 다들 거시기가 전라도 방언인줄 알고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을 떠올리지 못할 때 대신 쓰는 말이라 사투리라 해도 무방합니다만 거시기는 분명 전국적으로 쓰이고 있는 표준어입니다.

영화 ‘황산벌’은 ‘거시기’의 향연입니다.

‘거시기’로 시작해서 ‘거시기‘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의자왕도, 계백장군도, 백제병사들도 말끝마다 ‘거시기’를 연발합니다.

‘거시기’를 마치 백제의 상징이거나 백제의 전유물인 것처럼 등장시켜 ‘거시기’가 백제어, 곧 전라도 사투리의 본산인 것처럼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황산벌’이 전국 각지에서 인기리에 상영되었지만 ‘거시기’의 뜻을 몰라 헤맸다는 관람객을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황산벌’을 외국어로 더빙하면 그런 재미와 감동이 날까요?

상황과 의미가 다른 그 많은 같은 ‘거시기’를 제대로 번역할 수 없어 재미와 감동이 반감될 것입니다.

요즘 필자의 몸이 참 거시기합니다.

협심증에 협착증에 전립선에 족저근막염까지 말 그대로 움직이는 종합병동입니다.

거기다가 나라 꼴도 내 그것처럼 거시기 하니 울화통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4·13총선에서 참패를 당하고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새누리당도, 원내1당이 되어 국회의장직까지 차지한 더불어민주당도, 새 정치를 기치로 원내3당이 된 국민의당도 모두 거시기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핵보유국 운운하며 연일 미사일을 쏴대고 있고, 일본은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의석을 확보해 자위대가 아닌 군사패권국가로 가고 있고, 중국은 사드를 배치하면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군사적 조치를 하겠다며 협박하고 있는데, 국익과 국민은 온데간데없고 당권ㆍ대권과 당리당략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일터가 없어 취직은 물론 결혼·출산까지 포기하고 있고, 노인들의 고독사와 자살은 늘어만 가고, 선량한 여성들이 화장실에서 등산길에서 이유 없는 죽음을 당하고 있는데도 정부와 지자체는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조비리·해운비리·기업비리·공직비리로 나라가 거덜나고 있습니다.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고위공직자도 있으니 거시기해도 너무 거시기한 나라입니다. 지금 내 거시기가 웁니다.

/시인·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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