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를 대표하는 유적 ‘철당간’
청주를 대표하는 유적 ‘철당간’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7.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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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역사와 교육의 고장인 청주를 대표하는 유적은 무엇일까?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일까?

필자는 감히 청주 성안길 한가운데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용두사지철당간’을 청주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꼽고 싶다.

당간은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던 오늘날의 깃대와 같다. 대부분 절의 입구에 있는데 현재는 당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당간을 지탱하는 돌로 만들어진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 고장 청주에는 쇠로 만들어진 철당간이 존재한다. 청주 용두사지철당간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당간이 나무로 만든 것인데 쇠로 만들어진 것도 특이 하지만 왜 시내 한가운데 사찰을 건립하고, 철당간을 만들었는지 그 내역이 당간의 철 몸통에 분명하게 새겨져 있어 국보로 지정됐다.

한림학생 김원이 지었다는 철당간기를 보면 철당간을 세운 이유를 청주사람 김예종이 병에 걸리자 철당간을 세울 것을 부처님께 맹세한 것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사촌 김희일이 그 뜻을 살려 철당간을 완성했다는 내용과 당간기의 끝 부분에 준풍 3년, 고려 광종 13년인 962년에 만들어 세웠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내용 중에 학원, 학생 등의 교육과 관련된 기관이나, 관직명이 나타나고 있어 고려시대 초기부터 우리 고장 청주가 교육의 도시였음을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철당간에 활자와 같은 글자들이 새겨진 후 400년이 지난 1377년에 와서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된 것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고려 초기부터 청주에서는 꾸준히 금속과 관련된 첨단 기술이 발전해 왔고, 그 결과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철당간이 청주의 옛 이름과도 연관이 되어 더욱 의미가 있다. 청주를 부르는 명칭 중 하나가 ‘주성’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옛 기록에 전해지는데, ‘구리 돛대는 고을 성안 용두사에 있다. 절은 폐사되었지만 돛대는 남아있으며 높이가 10여 길이다’고 말이다. 옛 사람들이 청주를 물 위를 가는 배의 형상이라 했는데 그것은 둥근 모양의 청주읍성이 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후 청주읍성 내에서는 우물을 파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서 옛 우리의 선조는 이 철당간을 마치 배의 돛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철당간이 있는 곳은 용두사 터였다. 절 앞에 세운 철당간이 지금의 성안길 가장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옛 청주읍성 터 대부분이 용두사 절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세의 복을 기원하며 고려시대 번성했던 용두사는 화재나 홍수 등의 연유로 절이 폐사되면서, 그 자리에 성을 쌓고 현세 청주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이다.

필자는 청주를 대표하는 역사적 유적을 꼽으라고 하면 이 철당간을 제1번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철당간은 청주의 가장 한가운데서 역사적 현장을 묵묵히 지키며 수많은 세월 동안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청주의 정체성과 청주 사람들의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철당간이 우뚝 서 있는 광장은 청주 사람들의 인연의 장소이고,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철당간을 주목하자. 광장을 지키며 비바람과 온갖 공해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청주의 이정표가 되는 철당간, 청주의 자긍심과 같은 이 철당간에 천 년의 염원과 소망을 담아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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