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의 평범 성
악(惡)의 평범 성
  • 양철기 청주 서원초 교감<박사·교육심리>
  • 승인 2016.07.1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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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 양철기 청주 서원초 교감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 Arendt, 1906-1975)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2차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 갇혔다가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정치철학자의 길을 갔다. 1960년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인 아이히만(A. Eichman n)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잡혀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자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머물면서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이라는 보고서를 발행했다.

유대인의 학살을 제도적으로 체계적이고 열정적으로 실행에 옮긴 아이히만에 대해 재판관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적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아이히만은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명령받은 일이란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이는 일을 말한다. 한 유대인은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참석해 흐느껴 울다가 실신하고 만다.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당한 공포 때문으로 여겼으나 그녀가 밝힌 내용은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악마와 같다고 여겼으나 그는 선량하고 근면한 관료로 음악을 좋아하고 손녀의 재롱을 즐기며 음악을 들으며 황혼의 강가 산책을 좋아하고… 이런 평범한 인간 내면에 600만명의 생명을 죽이는 악마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것이었다.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은 악이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녀는 재판을 지켜본 결과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을 ‘극악무도한 인간이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평가했다. 아이히만의 범죄가 어느 악마적인 존재의 타고난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자성 없음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이히만은 타인의 아픔을 상상하지 않았던 ‘사유의 불능성’이 학살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악행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를 때 일어난다. 평범한 사람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순간 악행의 문턱을 넘게 된다. 아렌트는 평범한 아이히만이 악인이 된 원인을 세 가지 무능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말하기의 무능, 생각의 무능, 타인의 입장에서 판단하기의 무능이 그것이다. 불행하게도 생각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폭정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사고와 성찰의 부족으로 생기는 판단의 무능이 얼마나 큰 죄악을 부르는지.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살인의 의도가 그를 범죄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자기 성찰 없는 기계적 복종이 괴물을 탄생시켰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근 교육부 고위공무원의 발언과 생각이 폭염에 지친 필자를 비롯해 대한민국 국민 중 99%를 분노케 하고 있다. 영화 <내부자들>을 보며 “민중은 개·돼지와 같아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라는 대사를 들으면서 씁쓸하고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시사성 영화의 시나리오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는데 그때의 우려가 교육부 고위공무원의 고백으로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분 또한 고시 같은 엘리트 코스를 거친 성실한 관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노력하고 고생을 했으며 윗사람들과 정치권 등에 시달렸을까. 필자를 포함한 공무원들은 ‘악의 평범성’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아이히만은 내 이웃에, 내 옆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 아니 내가 아이히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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