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가면을 쓰자
행복이라는 가면을 쓰자
  • 박숙희<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 승인 2016.07.10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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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박숙희

마음의 문을 열고 더 자세히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를, 가진 것 없이 줄 수 있는 삶으로 반추하려는 직지」상권 스물한 번째 이야기는 남양 혜충 국사의 말씀이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산 화엄사 주지 각성 스님의 ‘직지’ 번역 및 강해(1998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혜충 국사가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이 일념상응입니까?”하고 물으니 혜충 국사가 말씀하시기를 “기억과 지혜를 함께 잊어버리면 곧 상응이니라.”그 스님이 말하기를 “기억과 지혜를 함께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까?” 혜충 국사가 말씀하시기를 “없는 것도 또한 공(空)이고 부처님도 또한 공이다. 그러므로 “없는 것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없는 것이라.’고 한다.”

기신론에서는 업상(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 삼세(三細)를 다 초월해서 부처가 되는 경지를 일념상응(一念相應)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근본무명을 다 끊고 8식 번뇌까지 다 끊어서 일념상응이 된다고 하는 것은, 번뇌망상 등 잡념 따위가 전혀 없고 항상 삼매에 있는 것이란다. 본각의 자리에 부합하는 것. 본래 불성 자리에 합치될 때를 일념상응이라고 한단다. 상응이란 곧 합한다는 뜻이겠다. 한 생각이 불성자리, 본각자리에 합해지는 것이 바로 일념상응이라는 것이겠다.

어떤 스님이 일념상응을 혜충 국사에게 물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혜충 국사가 기억하는 것과 밝게 꿰뚫어 아는 지혜. 이 두 가지를 다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일념상응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격외의 도리가 아니라 그대로 말한 것.

즉 일념상응은 바로 의식적인 기억과 또한 의식을 초월한 밝은 지혜 두 가지를 다 잊어버리는 것. 이는 곧 열반과 같은 자리라는 것일는지도….

반야심경》에는 없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로 무(無)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없는 것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곧 없는 것이라는 것. 조주 스님은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을 때 “없다”고 답했단다. 그 화두가 곧‘無’字 화두라는 것이란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나 부처가 아닌 이상, 장소나 지위에 따라 다른 얼굴이 나온다는 것 아니겠는가.

요즘 범부의 일상에서도 일인이역(一人二役)은 낯설지가 않듯. 최근 영화 ‘사냥’이나 드라마 ‘좋은 사람’에서의 일인이역의‘나’는 사뭇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부정적인 모습은 지우고 매력적인 면만 드러낼 수 있는 페이스북에서의 ‘나’와 현실에서의 ‘나’ 사이에도 틈이 존재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혜충 국사의 말씀 일념상응(念相應)은“의식적인 기억과 또한 의식을 초월한 밝은 지혜, 이 두 가지를 다 잊어버린 다는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가면을 쓰는 것과 일인이역 하는 것이 합한다면 과연 일념상응이 될 수 있을는지.

이는 배우가 직업적으로 남의 인생에 세 들어 사는 존재처럼 범부들의 삶 속에서도 연기가 깃들 수 있다는 것. 즉 행복의 가면을 쓰는 것은 혜충 국사의 말씀 ‘격외의 도리가 아니라 그대로 말하는 것과 닮았다는 것이겠다.

행복이라는 가면을 쓰고 산다는 극작가이자 대학교수이기도 한 ○씨는 “행복하고 늘 평정심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다.”며 “그것이 학생들에게 좋은 동기를 부여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단다. 이처럼 나와 공생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또 다른 나를 보여 주기 위해서는, ‘기억하는 것과 밝게 꿰뚫어 아는 지혜’를 잊어버리는 것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 봄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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