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에 대한 小考
개미에 대한 小考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6.07.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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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제법 실한 민들레 한 포기를 거머쥐었다. 뒤이어 민들레 뿌리가 지하세계에서 뽑혀 나오는 순간이었다. 잠복해 있던 개미군단이 기다렸다는 듯 내 손과 발등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작은 개미떼는 발등과 손등을 점령하고 말았다. 실수였다. 비 온 끝이라 뽑기 쉬울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지리한 장마가 계속 될수록 초록 생명들의 키는 하루가 다르게 커 가고 있다. 그와 함께 달갑지 않은 잡초들도 덩달아 키를 키우는 통에 마당은 온통 풀밭이다. 그중에서도 민들레는 생명력이 얼마나 강인한지 돌 틈 사이로 내린 뿌리는 잘 뽑히지 않았다. 그동안 눈엣가시였던 덩치 큰 늙은 민들레에 개미들이 집을 지어 놓았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터였다. 큰 나무에 많은 새가 깃들 듯, 개미들도 큰 민들레 뿌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모양이다.

현관을 코앞에 두고 이리도 거대한 집을 지어 놓은 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하다. 그동안 개미들은 내가 얼마나 후덕해 보였을까.

우리 집에는 공식적으로 네 마리의 길고양이들이 제집 인양 숙식을 해결하는 녀석들이 있다. 물론 오다가다 들르는 고양이들까지 합치면 여덟 마리 남짓은 되지 싶다. 그러다 보니 고양이 밥그릇엔 언제나 사료가 넉넉하게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 고양들은 제 몸을 핥고 치장은 잘하는데 비해 식사는 영 깔끔치가 않다. 언제나 밥그릇 주위에는 사료들이 떨어져 있다. 게다가 고양이들은 밖으로 떨어져 있는 사료들을 주워 먹는 법이 없다. 밥을 주고 한 시간도 못 돼 나가보면 그릇 밖으로 나뒹굴고 있는 사료 알갱이들은 개미에게 에워싸여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개미들의 욕심은 그것도 모자라 그릇에 남아 있는 사료까지 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개미를 기르고 있는 셈이다. 오종종한 몸으로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사료 알갱이 한 귀퉁이를 떼어내 줄지어 나르는 녀석들을 한참을 보고 있자니 웃음만 나온다. 눈도 성치 않은 녀석들이 어찌 구수한 사료 냄새를 맡고 이리도 많이 모여들었는지. 익히 개미의 사회성은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서 열심히 사료를 나르는 요 녀석들은 일개미일 것이다. 지상으로 나와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 말고도 지하세계의 개미굴에는 이보다 더 많은 개미가 있을 터. 민들레 밑동에 숨어 있던 녀석들을 어림잡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개미를 두고 어떤 학자는 동물 집단 중에서 제일 인간과 닮은 동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여왕벌을 중심으로 번식을 담당하는 수개미, 그리고 일만 하는 일개미, 적이 침입하면 제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내는 덩치가 큰 병정개미. 개미는 ‘부지럼’의 대명사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개미 집단에도 빈둥빈둥 ‘노는 개미’들이 있다는 것이다.

‘노는 개미’들은 일하는 개미들이 지쳐 있을 때 일을 대신 하기도 하고, 개미굴에 일이 생기면 일사분란하게 다듬고 정리하여 복구한다고 한다. 이러한 ‘노는 개미’ 덕에 개미 사회는 멸망하지 않고 생존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만약의 사태에 준비하고 있는 개미들이 많으니 말이다.

우리 인간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물론 과거에 비해 노동시간이 단축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로 대표되는 ‘일개미’들에게는 휴식이 부족하기만 하다. 인간 사회와 제일 닮아 있다는 개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인다. 손톱보다 작은 모습 개미의 역사 앞에 감히 덩치만 큰 인간의 역사를 논할 수는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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