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서원향약
율곡의 서원향약
  • 박상일 <청주문화원·수석부원장>
  • 승인 2016.07.07 17: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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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박상일 <청주문화원·수석부원장>

청주 중앙공원은 청주읍성의 중심부이자 조선시대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공원 망선루 앞에는 커다란 오석에 새긴 서원향약비가 있다. 매일 수많은 사람이 비석 주변을 노닐고 있지만 관심 있게 읽어보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저 공원을 장식하는 거대한 구조물로 인식하고 있지 않나 싶다.

향약(鄕約)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또는 그 규약에 근거한 조직체를 말한다. 중국 북송 말기 섬서성 남전현에 살던 도학자 여씨 4형제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 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이라는 4대 강목을 내걸고 시행한 남전향약이 시초이다. 이후 주자가 보완한 ‘주자증손여씨향약’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1518년(중종 13)에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주장으로 전국에 걸쳐 향약이 시행되었으나 이듬해 기묘사화로 인해 중단되었다.

명종 이후 부활되었는데 대표적 향약으로는 퇴계 이황의 예안향악과 율곡 이이의 서원향약 해주향약이다. 예안향약은 퇴계가 향리에 낙향한 후 선배인 이현보의 유지를 받들어 제정한 것으로 퇴계 생존 시에는 시행되지 못했다. 율곡은 서원향약을 비롯한 4종류의 향약을 제정하고 일생을 향약과 관련하여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향리 교도에 진력한 대표적인 유학자다.

율곡은 1571년(선조 4)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10개월간 청주목사로 재임하면서 백성을 교화하고 미풍양속을 진작키 위해 서원향약을 만들었다. 율곡이 부임하기 직전에 조광조의 측근이던 박훈과 김정을 배향한 신항서원이 청주에 세워지는 등 지방 사림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대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서원향약의 특징은 양천을 막론하고 모든 주민을 참여시키는 계조직을 향약조직과 행정조직에 연계시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청주목은 25개면으로 도계장 4인 계장 25인 동몽훈회 1인 색장 1인에 각 리마다 별검을 두도록 했다. 그리고 선행 18조목과 악행 23조목을 구별하여 서술했는데 그 내용이 구체적이다.

몇 조목만 소개하면 선행에는 유교의 기본덕목 외에 염치와 지조를 잘 지키는 것, 은혜를 널리 베푸는 것,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 조세를 잘 바치는 것, 남과 상대할 때 신의가 있는 것, 남을 선으로 인도하는 것, 남들의 싸움을 말리는 것, 남의 환난을 구제해 주는 것, 남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 남의 잘잘못을 판단해 주는 것 등이 있다.

악행에는 아내를 박대하는 것, 상을 당하여 슬퍼하지 않는 것, 제사를 공경히 받들지 않는 것, 젊은이가 어른을 깔보는 것, 술에 빠지거나 노름을 즐기는 것,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깔보는 것, 말을 만들고 무고하거나 헐뜯는 것, 조세를 잘 내지 않는 것, 법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는 것 등이 있다.

서원향약은 상부상조와 권선징악의 규약이 매우 구체적이며 심지어 회의석상에서 앉는 자리의 순서와 방향까지 세밀하게 정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손을 모으고 용모를 가다듬어 행여 킬킬 웃거나 자세를 흩트리지 않게 하며 좌석이 정돈되면 유사는 큰 소리로 약문(約文)을 읽어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듣게 하고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잘 깨우쳐서 그 뜻을 알게 하라고 했다.

또한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해야 하는 것이 특징이다. 만약 참여하지 않을 때는 관에 보고하여 죄를 다스린 뒤 고을에서 쫓아낸다는 규약은 향약을 준수하도록 강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원향약은 취지와 조목의 내용이 가장 완비된 향약으로서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도 참고할 점이 많고, 각종 모임의 정관을 정할 때 지침서가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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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당 2016-08-03 15:08:00
서원향약비는 훼손되지 않았나 봅니다. 오늘날에도 참고할만한 규약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당시에는 지배계층에서 백성들을 계도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특히 지도층에서 많이 참고하여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