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골과 연탄재
수암골과 연탄재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7.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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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처음 대하던 순간의 전율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지 못한다.

구구절절 장탄식보다 굵고 짧게 전하는 메시지에 가슴이 더 쿵쾅거리는 것은 그저 세월 따라 늘어난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는 연탄이 그저 강력한 화력으로 생선이나 고기류의 맛을 한층 돋워 주는 보조재로 인식될 것이다. 이와 함께 엄동설한이 시작되기 전 그럴듯한 단체들이 함부로 얼굴에 검정 칠을 해가며 산비탈 달동네에 연탄을 나르느라 기다란 인간띠를 만들어 신문에 실릴 사진을 찍는 어설픈 봉사의 도구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연탄은 서민의 모진 삶을 이어가는 생명의 온기나 다름없었다.

추수가 끝나고 첫서리가 내리기 전부터 가장들은 백여 포기를 훌쩍 넘기는 김장 배추 마련에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고, 비좁은 광에 연탄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에헴!”하고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마음껏 펼 수 있었다.

북풍한설을 견디기 위해 단칸방에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자다가 문틈으로 스며든 연탄가스에 질식돼 한꺼번에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은 그때나 지금이나 좁혀지지 않는 빈부차이에 따른 서러움과 다름이 아니다.

제 몸을 다 태워 하얗게 질린 연탄재의 식은 몸도 나름 든든한 역할이 있었다. 눈 내려 미끄러운 산비탈 내리막길의 낙상을 방지하기 위해 제 한 몸 아낌없이 부서지는 연탄은 온통 사람에게로 향하는 뜨거움,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나는 팔팔할 때 얼마나 뜨거웠으며, 또 그나마 남은 온기를 얼마만큼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었는가. 사는 것이 시들해지고 외롭기 그지없을 때 나는, 남아 있는 식은 몸을 철저하게 분쇄하면서 장렬하게 산화할 각오는 있는가.

청주시가 수암골에 연탄재를 활용한 관광콘텐츠 개발에 나선다.

수암골은 여러 가지 드라마 촬영과 벽화 투어로 이미 꽤 유명한데, 그곳을 동화와 모바일 콘텐츠, 캐릭터 등 연탄재를 원형으로 하는 관광 콘텐츠를 만들어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리겠다는 생각이 겹치면서 관심이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수암골은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개발로 인해 원형의 손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극성의 자본주의 시대에 토지자본이 중심이 되는 사유재산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기 위해 현대식 건물을 짓고 카페 촌으로 변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딱히 마땅치 않다. 게다가 그런 자본의 침식으로 인해 원주민의 서러운 이주가 빨라지고, 그나마 남은 주민들조차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일은 모순인 동시에 분배 정의가 적용되지 못하는 비극이다.

추억의 단계를 지나서 이미 전설쯤의 언저리로 진입하는 연탄재가 관광콘텐츠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될 수 있음은 기대가 크다.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 낡은 것과 새로운 문명의 통섭은 그래서 더 절실한데…

시인 고은의 짧은 절창,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은 또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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