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 박숙희<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 승인 2016.07.0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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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박숙희

마음의 문을 열고 더 자세히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를, 가진 것 없이 줄 수 있는 삶으로 반추하려는 「직지」상권 스무 번째 이야기는 영가 현각 대사(永嘉玄覺大師)의 또 다른 말씀 중 유마거사가 두 비구를 제도한 것이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산 화엄사 주지 각성 스님의 ‘직지’번역 및 강해(1998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두 비구가 음행과 살생을 범함에 우바리 존자의 반딧불 빛은 죄의 결박만을 더하고 유마 대사는 단번에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 빛나는 태양이 서리와 눈을 녹이는 것과 같도다.

당시에 출가사문인 두 비구가 각자 토굴에서 공부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날이 저물 때 어떤 여인이 비구처소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한 비구가 여기서는 자고 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다른 한 비구의 처소에서 자고 가겠다고 하고는 갔단다.

거절했던 친구가 다음 날 자기 친구가 공부하는 곳에 가보니 그 여인이 그 도반의 토굴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에 어쨌나?”물으니 “같이 잤다”는 것이다. 처음에 거절했던 그 비구가 그 여인이 자기 도반을 파계시키고 공부를 못하게 바람을 냈다고 해서 죽여 버렸단다. 그래서 한 비구는 강간을 범했고 한 비구는 살생을 범했단다.

홧김에 저질러 놓고 이성을 되찾아 잘못했다고 참회를 하려고, 부처님 십대 제자 가운데 지계제일인 우바리 존자를 찾아가서 참회를 청했단다. 그런데 어느 정도 작은 죄라야 참회가 통할 수 있지, 사람을 죽이고 파계한 사바라니 죄를 범한 것은 참회가 통하지 않는다며 우바리 존자는 참회하는 것을 거절했단다.

이 두 비구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큰 죄를 범했으니 장차 어떻게 할까 하고 굉장히 비관을 하고 슬퍼했단다. 그때 유마거사가 나타나서 우바리 존자에게 “그대는 그런 식으로 설법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두 비구에게 지은 죄를 가지고 오면 참회시켜 주겠다고 했단다. 두 비구가 자기들의 죄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단다. 허망하고 그릇된 마음에 죄를 짓기는 지었지만 그 허망한 마음을 찾아본들 실체가 있겠는지.

그래서 두 비구는 허망한 마음도 죄도 본래 도리라는 것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는 백겁 동안 쌓인 죄도 한 생각에 다 없어진다는 것 아니겠는가. 유마거사는 그런 차원에서 두 비구를 제도 했는데 <증도가>에 그것을 말한 것이란다. 대승법은 그야말로 뛰어난 격외의 도리와 형식을 초월한 불가사의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꼬집어서 말한 것이겠다.

이와 같이 세상과의 통로는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철학자 니체는 세상은 해석 한 대로 존재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즉 삶을 어떻게 느끼고 어느 때 감각이 새로 깨어난다는 것을… .

유머거사의 말씀 “단번에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 빛나는 태양이 서리와 눈을 녹이는 것과 같도다.”처럼 진짜 이해하는 것은 온몸으로 느끼는 것 아니겠는지. 이는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는 통념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봄의 의미가 햇살인 것처럼 잠든 감각을 어떻게 깨울 것인가이다. ‘사과’하면 뉴턴, 백설공주, 스티브잡스, 선악과 등이 떠오르듯. 유마거사가 두 비구를 제도(濟度)한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를 곰곰이 되돌아보게 하는 의미. 그러니 산다는 것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과 닮지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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