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옥한 계절에는
비옥한 계절에는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07.0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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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주말부부인 큰아이는 결혼 후에도 늘 어미 집에 와서 밥을 얻어먹는다. 제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자다시피 한다. 결혼한 뒤 바로 입덧을 하는 경사가 생기는 바람에 그렇게 된 일인데, 주말에 제 남편과 병원 간다더니 일찌감치 온 모양이었다.

“엄마, 해물탕 끓이려고 하니까 청양고추 좀 따서 일찍 퇴근해!”

울렁거림이 좀 가라앉는지 모처럼 음식 솜씨를 발휘할 모양이었다. 큰아이의 전화를 받자 더 분주했다. 작은아이가 파 몇 뿌리 뽑는 동안 나는 청양고추와 가지를 땄다. 입덧하는 큰아이가 좋아하는 딱딱한 복숭아도 몇 개 골라 서둘러 차의 시동을 걸었다.

초보 복숭아 농사꾼인 나는 봉지 씌우기 작업이 끝나면 좀 한가해질 거라 믿었다. 바쁜 일 좀 치우고 나서 미장원도 다녀오고 여름옷도 좀 사러 갈 짬은 날 줄 알았다. 아직 정리도 못 한 봄옷은 깊이 넣고 여름옷을 꺼내야지 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이었다. 복숭아 다 익었는데 안 따고 뭐 하느냐며 이장님이 달려오셨다. 병아리 농사꾼 내 눈에는 아직 덜 익은 것 같은데, 복숭아는 너무 익으면 유통 중에 물러버려 조금 덜 익었을 때 따야 한다는 것이다. 창고 정리도 못 했고 자재 준비도 안 한 상태였다. 같이 농사짓는 작은아이와 나는 체력 충전할 시간도 없이 그날부터 다시 며칠을 동동거렸다. 그리고 오늘 수확을 마무리했다. 이제 다음 품종 수확기까지는 다소 여유가 있으리라.

참으로 오랜만에 세 모녀가 이야기꽃 피우며 싱크대 앞을 오갔다. 큰아이가 해물탕 끓이는 동안 나는 가지를 찌고 시금치도 데쳤다. 작은아이는 설거지를 하며 양념을 준비했다. 서연이와 두 사위는 온 지 이틀 되는 강아지와 놀면서 간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방금 거두어 온 재료들은 가지나물과 시금치나물이 되어 예쁜 접시에 다소곳하게 담겼다. 다듬고, 씻고, 데치고, 찌고…. 손 많이 가는 나물 반찬이 오르자 모처럼 싱그러운 식탁이 되었다. 오이지는 한 개 썰어 물에 띄워 유리그릇에 담고, 김치도 새로 꺼냈다. 멸치조림도 작은 접시에 조금만 덜어냈다. 중간에 해물탕 냄비를 올리자 풍성해진 식탁에 아이들이 환호했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 통 꺼내 밥만 퍼서 먹다가 제대로 된 밥상 앞에 앉았으니 자연스럽게 나온 환성이다.

한 끼의 식사는 그저 배만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밥을 먹으면서 새 식구가 된 강아지 <나무> 이야기와 복숭아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다가 임신, 출산, 육아 쪽으로 이야기가 옮아갔다. 여기에서 서연이가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게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보호자가 될 것이다, 친구가 될 수 있다, 팽팽한 두 의견 사이에 웃을 일이 많이 생겼다.

소소한 이야기를 느긋하게 나눌 수 있는 한 끼 식사의 여유. 겨울철이었다면 별일 아닌 이 여유가 유독 특별한 것은 여름이 비옥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모든 식물의 키를 쑥쑥 키우는 이 계절에는 농부도 계절의 모습을 닮는 것이 좋다. 많은 노동을 해야 하는 체력은 지칠 줄 모르는 비옥한 여름 땅을 닮는 것이 좋고, 발걸음은 여름 식물이 크는 속도처럼 보폭이 커야 좋다. 거기에 마음까지 여름 들녘처럼 넓을 수만 있다면 무얼 더 바라랴. 그런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동동거리는 일상에서도 잠시의 여유를 좀 더 자주 누릴 수 있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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