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학자·교육자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위대한 학자·교육자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6.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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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넓은 진천 뜰을 가로질러 초평면 쪽으로 가다 보면 산직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충청북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된 초가집인 이상설의 생가와 숭렬사, 그리고 동상과 숭모비가 있다. 숭모비와 사당은 원래 진천읍 교성리에 있던 것을 1997년 정화사업을 하면서 이곳 생가로 옮긴 것이다.

헤이그 특사로 잘 알려진 보재 이상설 선생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분이다. 7세 때 양자로 입양되었으나, 불행히도 그 부모마저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24세 때 과거에 합격했으며, 27세의 나이로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이 되었다.

선생은 전통 유학으로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학으로 근대적 학문인 정치, 법률, 경제, 사회, 수학, 과학, 철학, 종교 분야까지 독학으로 섭렵한 천재였다. 그리고 한국 최초로 근대적인 수학 교과서를 저술하는 등 그는 ‘신구학문을 겸비한 한국 제일의 학자’라고 평가 받았으며, 안중근의사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상설을 꼽았다고 한다.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선생은 일찍이 ‘을사늑약’ 체결 반대 상소를 다섯 차례 올렸으며, 관직을 버리고 조약 파기를 위한 항쟁을 추진하였다. 각부 대신을 찾아다니면서 조약 체결이 곧 ‘국망’이고 민족이 ‘왜적의 노예’가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 해 11월 30일 민영환의 순절 소식을 듣고 종로 거리에 나가 국권회복운동에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땅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에게 구원되었다.

국내에서 민족구국 활동을 하던 이상설은 1906년 이동녕선생 등과 함께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하여 최초의 항일 민족 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웠다. 선생은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직접 신학문인 국제법과 수학, 정치학 등을 교육하며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했다.

1907년에는 이준, 이위종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수석 특사로 참가하여 대한제국의 상황과 일제에 빼앗긴 외교권 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협상 성격을 띤 회의였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 후 우리나라에 많은 도움을 준 미국인 헐버트와 함께 미국과 유럽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그 보복으로 선생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이때 선생은 재판에 참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선생은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등과 함께 여러 애국지사를 규합하여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계속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시베리아의 니콜리스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상설선생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러시아의 우수리강에 뿌려졌고, 그가 남긴 유품과 글들도 모두 불태워졌다. 1996년 그의 유해가 뿌려진 우수리강변에서 학계와 문중 사람들이 초혼제를 올리고 한 줌의 흙을 가져왔다. 선생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 진천 땅으로 8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처럼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위대한 선생님께 우리는 겨우 1962년도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는 것으로 겨우 체면치레를 했다.

6월! 아픔도 많은 이달에 선생님의 생가를 찾아가 선생님의 큰 뜻을 오늘에 되새기며 더 부강하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노라고 다짐이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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