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 끝에 찾은 역사의 기억들 … 직지를 깨우다
노력 끝에 찾은 역사의 기억들 … 직지를 깨우다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6.06.29 1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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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금속활자본 직지의 비밀을 풀어라

본문 '곧장 바라보고 즉시 께달으라'는 가르침 담겨

1377년 고려 멸망 직전 발간...당시 사회 분위기 짐작

파리국립도서관에 있던 하권목판본 직지로 비밀 풀려

직지가 발견되고, 현존하는 세계 最古 금속활자본으로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는 기적에 가까웠다. 1377년 금속활자로 책이 발간된 후 1972년 파리국립도서관 수장고를 벗어나 햇빛을 볼 수 있기까지 595년 역사는 침묵의 세월이었다.

어렵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금속활자본 직지는 상·하권 중 하권만 존재했고, 서문이 없는 상태에서 책 뒷장 간기(刊記)에 ‘선광7년정사7월 일 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라는 단초만 남겨두었다. 600여 년 책이 품었던 비밀은 후대인들의 몫으로 남겨졌고, 많은 연구자의 노력으로 흩어져 있던 직지의 실마리들이 고리를 지으며 과거의 봉인을 풀었다.

▲ 파리국립도서관(왼쪽), 복원된 직지 금속활자영인본(오른쪽)


△ 직지를 발간한 1377년 당시 고려

직지는 고려 고승인 백운화상이 역대 여러 부처와 고승들의 법어, 대화, 편지 등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편찬한 책이다. 75세인 백운화상이 성불산 성불사에서 145가의 법어를 가려 상·하 두 권의 <직지>를 편집해 만들었다. 그리고 직지를 저술한 후 2년 뒤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했으며, 직지를 저술할 당시에 제자로 있던 석찬과 달담 등은 ‘백운화상의 직지’를 1377년 청주목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게 된다. 이것이 세계기록문화유산 <직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또는 ‘불조직지심체요절’, ‘불조직지심체’라고도 부르는데 본문은 ‘곧장 바라보고 즉시 깨달으라’라는 가르침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백운화상이 깨달음을 강조한 데에는 당시 사회분위기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책이 발간된 1377년은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이었으니 사회는 혼란하고 민심이 흉흉했을 것이다. 선각자인 백운화상은 많은 이들이 어리석음에서 하루빨리 깨어나 어지러운 나라가 바로 서길 바랬던 것은 아닐까 하는 고뇌도 읽힌다.

△ ‘금속활자본 직지’의 비밀을 푼 목판본 직지

파리국립도서관에 하권만 남아있던 ‘금속활자본 직지’의 비밀을 푼 것은 ‘목판본 직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목판본 직지는 1378년 취암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현재 보물 1132호로 지정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 중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 직지는 금속활자본 직지를 발간한 다음해인 1378년 크기는 세로 21.4㎝, 가로 15.8㎝ 책자로 간행됐다. 이처럼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으로 간행한 이유는 지방 사찰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미숙하고, 예산 문제로 많은 책을 간행하고 보급이 어려웠던 때문으로 보인다. 목판본 직지의 존재로 금속활자본 직지의 비밀이 풀릴 수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측은 목판본 직지심체요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1972년 프랑스에서 박병선 박사에 의하여 소개되었지만 하권만으로 되어 있고 서문이 없으며 내용이 불충분하여 책의 성격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를 보완한 것이 바로 직지심체요절 목판본이다. 이 목판본은 단순히 금속활자본을 보완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직지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시켜주고 금속활자본 직지를 찾게 해주는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이 목판본 간행기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 4년(1378) 6월에 백운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에서 제자 법린 등이 우왕 3년(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간행한 것이다. 서문은 1377년에 성사달이 쓴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앞부분에 1378년에 이색이 쓴 서문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이와 동일한 판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있으나, 이 판본이 인쇄상태가 좋은 편이고 두 개의 서문이 붙어 있어 완전한 형태이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목판본 직지(사진자료제공)왼쪽)

△ 직지가 프랑스로 넘어간 까닭은

직지는 시대를 뛰어넘고 국가를 초월해 1972년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수장고에서 발견된다. 청주 흥덕사를 떠난 금속활자본이 멀고 먼 프랑스로 가게 된 이유는 불운했던 대한민국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일제강점하에 놓인 한반도는 동양에 눈독을 들인 서양강대국들의 침략에 무방비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역시 조선을 압박하며 개방을 강요했고,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초대 주한 대리공사로 꼴랭 드 쁠랑시가 부임해 서울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고서와 각종 문화재를 수집한다.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1906년 파리로 떠난 쁠랑시는 우리나라에서 수집해간 대부분의 고서는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했다. 이후 앙리 베베르가 직지를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경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기증된다.

/연지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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