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갠 여름날
비 갠 여름날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6.2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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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오뉴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속담이 있지만 여름에도 반가운 손님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비이다.

비는 무더위를 식혀주기도 하고 고된 농사일을 쉬게 해주기도 하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비는 내릴 때보다 그치고 난 뒤가 더 좋으니, 후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唐)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은 여름 비가 그치고 난 뒤, 밖에 나가 빗물에 씻겨 말쑥해진 풍광에 매료되고 말았다.


초여름 비개인 후 우계를 찾아서(夏初雨後尋愚溪)

悠悠雨初霽(유유우초제) 하염없이 내리던 비 막 개서
獨繞淸溪曲(독요청계곡) 홀로 맑은 시내 구비를 둘러보네
引杖試荒泉(인장시황천) 지팡이 끌어다 황량한 샘 재어보고
解帶圍新竹(해대위신죽) 허리띠 풀어 새로 자란 대나무에 걸어둔다
沈吟亦何事(침음역하사) 힘들여 읊조리는 것 또한 무슨 일이랴
寂寞固所欲(적막고소욕) 조용한 삶이 본디 바라던 바였네
幸此息營營(행차식영영) 다행히 이곳은 아등바등 살 일 없으니
嘯歌靜炎燠(소가정염욱) 노래나 읊조리며 찌는 더위 가라 앉히네.


지루하게 내리던 장맛비가 드디어 멈추고 이제 막 날이 개었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상큼함이었다.

비 온 끝이라 날씨도 시원하고, 눈에 보이는 풍광은 정갈하고도 아름답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비 때문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집 안을 벗어나 바깥나들이를 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도 집을 나서 인근 냇가를 거닐었던 것이다.

비가 그치고 나서 물이 맑아진 시내를 홀로 돌아보았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이곳저곳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오래도록 사람들이 쓰지 않은 채 방치된 샘을 만났다.

시인은 무의식적으로 짚고 있던 지팡이로 그 샘을 건드려 본다.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살짝 궁금했을 뿐이다. 샘을 지나쳐 걷다가 이번에 만난 것은 대나무밭이다. 시인은 그냥 지나치지를 않고 새로 돋은 대나무에 허리띠를 풀어 걸쳐본다. 이 또한 별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새로 돋아나 약한 대나무니만큼 허리띠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문득 시를 힘들여 읊조리는 것조차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디 조용하게 사는 삶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던가?

세상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노래를 읊조리고 있노라면 여름 더위는 저절로 물러나고 만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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