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시원(始原) - 점말동굴(2)
제천의 시원(始原) - 점말동굴(2)
  • 여은희<제천시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16.06.2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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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여은희

점말동굴은 산악지대에 퍼져 사는 동물들과 평원 또는 들판에 사는 동물들이 골고루 섞여 살 수 있는 위치와 곳곳의 늪지로 인하여, 구석기시대는 물론 현세 이후의 신석기시대 및 역사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병풍바위 동굴 위쪽 건축물을 지었던 굼의 흔적과 더불어 기와조각ㆍ그릇조각들을 비롯하여 탄생불, 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놋쇠 부처의 오른손이 동굴 앞에서 출토되어 사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으며, 점말동굴의 벽면에 새겨진 ‘禮府(예부)’, ‘郞(김랑)’, ‘祥蘭(상란)’ ‘행(行)’자 등 다양한 글자들은 분석한 결과 신라의 관청명과 화랑들의 이름, 이들이 다녀갔다는 유적지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구석기 사람들의 삶터였고, 신석기 사람들이 터전을 잡았으며, 역사시대에는 신라 화랑들이 수련의 장으로도 사용하였던 제천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점말동굴 앞에 서면 먼저 ‘아!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느끼는 공간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공감의 아늑함이 다가온다.

점말동굴 이후 청원 두루봉동굴, 단양 상시바위그늘유적, 단양 금굴, 영월 피난굴(쌍굴), 평창 쌍굴 등 여러 구석기 동굴유적이 발굴되었지만 한반도 문화와 자연환경의 시원을 최초로 밝혔던 점말동굴은 충북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지만 그 현주소는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포전리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동굴의 진입로 부분과 동굴 앞 광장은 정비가 되어 비록 한적한 길이지만 찾아가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제천을 찾는 방문객 중 점말동굴을 갔다가 출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곤 하는데 그러다 보니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곳으로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에 양해 바란다는 안내를 하게 된다. 찾는 이들에게 점말동굴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루빨리 포전리 전체를 아우르는 정비는 물론 점말동굴의 역사성과 그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전시관이나 체험관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제천 점말동굴은 제천은 물론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환경을 밝힌 시원(始原)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점말동굴 발굴자 손보기선생(1922~2010)은 일제강점기의 아픈 기억으로 인하여 늘 푸르름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은 ‘파른’이라는 아호를 쓰며, 업적으로는 어려운 고고학 용어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먹도끼’라고 하는 등 우리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1984년 ‘한국 고고학용어집’을 발간하여 구석기 용어의 한글화 작업에도 앞장서 한국 구석기 연구의 ‘개척자’ 혹은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 밖에도 고려의 금속활자가 서양의 것보다 앞선 세계 최초의 것이라는 연구 발표를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 연구 및 한국 이민사, 조선시대 사관 연구 등 고고학자로서, 사학자로서 한국역사 연구에 폭넓은 발자취를 남기며 연구에 평생을 바쳐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하고자 한 선생의 일생은 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큰 교훈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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