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 맥주
캔 맥주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6.2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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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향으로 먹는 음식들이 있다. 홍어가 대표적일 텐데, 호오가 갈린다. 외국인들이 김치를 즐겨도, 마른오징어 군것을 잘 먹어도, 청국장을 좋아해도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삭힌 홍어다.

젊은 시절 미군들이 한국 음식을 멀리 하는 것을 보고 공연히 오징어를 먹여서 먹으면 잘 대해준 것이 떠오른다. 오징어가 시체 썩은 냄새가 난다고 몸서리를 치는 미군은 한국에 우호적이지 않으리라는 섣부른 편견 때문이었다. 오징어를 잘 먹던 미군은 예뻐서 집에까지 데려와 술을 먹였을 정도니까.

당시만 하더라도 나도 홍어라는 음식을 몰랐고, 그저 잔칫집의 무친 홍어나 알 정도였다. 그러나 홍탁을 알게 되면서 막걸리의 안주로 홍어가 잘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의 젊은 내가 삭힌 홍어 맛을 알았다면 외국인들에게 억지로 홍어 먹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홍어가 지금처럼 비싸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왜 홍탁일까? 비슷한 음식끼리는 색깔이 비슷한 옷처럼 어울리는 것 같다. 상극(相剋)도 있고 상쇄(相殺)도 있지만, 상보(相補)가 기본일 것이다. 그러니까 발효 음식끼리 어울린다는 말이다. 상승작용, 이를테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겠지만.

막걸리에 치즈가 안주로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그리 해보니, 정말 잘 어울렸다. 그것도 웬만한 노란 치즈가 아닌 시커먼 블루치즈나 허연 브리치즈의 꼬릿한 맛과 막걸리는 잘 어울린다. 발효끼리의 앙상블이다. 물론 술도 잘 익고, 치즈도 잘 익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포도주에도 팍삭 익은 총각김치가 잘 어울린다. 서로의 모자란 점을 채워준다고나 할까, 서로를 감싸준다고나 할까.

내가 잊지 못하는 향 가운데 하나는 특정한 차 내음이다. 대만의 포종(包種)차인데, 그 향이 기가 막히다. 거꾸로 맛은 향보다 못하다. 잎담배 맛이 그 향보다 못한 것과 같다. 그 차는 심신이 피곤할 때 그리워진다. 뜨거운 물에 재빨리 우려내버리고 나서 향이 피어오를 때 코를 박고 있으면 냄새만으로도 정신이 기뻐지는 것(이신怡神)을 느낄 수 있다. 햇차면 더 좋겠지만, 그런 호사가 내 가까이에 자주 벌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동료 교수가 대만에서 차를 선물 받았다며 덜어주었는데, 감사하게도 바로 그 차였다.

코 박기 차! 보기에는 얄궂을지 몰라도 일단 코를 박고 볼 일이다. 중국에는 입을 대는 입구가 벌어지지 않는 깊은 형태의 냄새 맡는 찻잔도 따로 있는데, 내가 차호(茶壺: 차 주전자)에 코를 박고 있다고 해서, 차호를 손님에게 들이 내민다고 해서 품위 없다고 욕하지 말길 바란다.

어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목욕 후 들린 편의점에서 여러 종류의 유명 맥주를 싸게 팔아 기대 속에 마시는데 영 맛이 나지 않았다. 내 코가 이상한 것인가 싶어 익숙한 맥주를 먹어보아도 기대하는 맛이 나지 않아 이상했다. 기억 속의 맛이 아니었다.

결국 원인을 알았다. 캔 맥주였는데 향이 코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입으로만 먹고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본래의 맛이 살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입에 닿은 데만 살짝 따지는 캔의 구조가 코의 역할을 방해했던 것이다. 이제야 내가 캔 맥주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았다.

한마디 더. 테이크아웃커피를 뚜껑 열고 먹는다고 노인네 같다고 하지 마라. 난 드넓은 향을 원할 뿐이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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