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과 곡성 그 빛과 소리의 변주곡
밀양과 곡성 그 빛과 소리의 변주곡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6.2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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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보고 ‘밀양, 그 빛의 다양한 스펙트럼’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지 벌써 몇 해가 흘렀다. 그 때 나는 영화 <밀양>을, 용서를 화두로 내세우면서 신과 인간 사이의 갈등과 인간 내면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가늠하고 있는 영화로 표현했다. 더불어 이 영화가 밝음과 따뜻함으로 상징되는 ‘빛’이 상상하기 힘든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상징했다. 동시에 “내가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는갚라는 주인공의 극단적 절망감에서 쏟아지는 처연한 햇살의 ‘빛’이 더 이상 찬란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변주곡으로 설명한 바 있다.

2007년에 개봉된 영화 <밀양>은 서울에서 밀양으로 숨어들듯 찾아온 주인공 신애의 부동산과 관련된 욕망에서 비롯되는 비극을 토로하는데, 거기에는 장소적 동질감의 결여가 모티프가 된다. 경제성장과 재산증식에만 몰두하는 욕망이 원주민과의 갈등으로 빚어지면서 유괴 살인으로 이어지는 비극에는 ‘서울’과 지역인 ‘밀양’의 화해할 수 없는 거리가 숨어 있다. 그리고 거기 은밀한 빛(密陽)에는 인간과 신, 그리고 영상으로 은유 되는 일종의 환각이 있다.

그리고 9년 세월이 흘러 맞은 2016년. 영화 <곡성(哭聲)>은 <밀양>보다 훨씬 저 잔인하고 심오하다. 용서를 대신해 ‘의심’을 화두로 삼은 영화 <곡성>은 ‘빛’을 최대한 사양한 채, 어둠과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사투다. 영화 <곡성>은 시종일관 전라도 사투리가 지배한다. 걸쭉한 욕설과 구수한 해학이 깃들어 있어 흥미를 유발하기는 하지만, 지역적 한계성을 뛰어넘는 기대는 어렵다.

소리, 그 가운데 음성을 통한 기호전달 체계는 시각에 의존하는 ‘빛’에 비해 훨씬 직설적이다. 신을 초월해 인간끼리의 화해를 시도하는 은밀한 빛(密陽)과는 달리 누가복음 24장 37~39절을 전면에 내세우며 청각을 통해 던지는 ‘의심’에 대한 화두는 신에 대한 인간의 의탁과 나약함을 더 절실하게 드러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는 구절은 맹목의 인간이 따라야 하는 신의 영역이다.

그런데 원인과 이유가 없다. <밀양>의 투기자본의 욕망을 대신하는 자리에는 무자비한 연쇄살인과 ‘서울사람’이 아닌 ‘일본인’으로 범위를 넓힌 이질감의 확대만 있을 뿐이다.

<곡성>에는 공권력의 상징이자 파수꾼인 경찰이 주인공이지만, 거기 공권력에 의한 속 시원한 해결은 없다. 하기야 원인도 이유도 없는 연쇄살인과 아직 성숙하지 못한 소녀에 파고든 악령을 악마의 소행으로 상정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어찌 감히 그 비극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영화 <곡성>은 사람 사는 마을에서 결코 인간사회를 말하지 않는다. 전라도 산골 작은 마을의 정지된 평화를 깨뜨리는 연쇄살인에 대한 인간의 대처는 전혀 공동체적 모습이 아니다. 다만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의 각인만이 공포로 남아있을 뿐이다.

선량한 사람이 희생되는 비극에서 ‘화해’조차 부질없는 9년의 세월. 악이 있으면 어딘가 선이 있음도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데, 쉽사리 찾기 어려운 희망. 애꿎은 지방자치단체 곡성군 공무원이 희생된 찰라가 가져온 통곡의 소리(哭聲)도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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