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국 통일의 영웅, 김유신 장군과 진천
3국 통일의 영웅, 김유신 장군과 진천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6.15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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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삼국 통일의 영웅인 김유신 장군이 진천 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당연히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가야 땅인 김해에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천에는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었던 태령산이 있고, 산 아래 어린 시절 생가로 추정되는 곳에 우물과 여러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길상사가 있어서 우리 고장 진천이 김유신 장군의 역사와 정신이 흐르는 역사적인 고장임을 알게 한다.

김유신 장군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만노군(진천군)의 태수로 부임하는 남편 서현을 따라 진천으로 왔고, 그곳에서 595년 김유신이 출생하였는데, 진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15세에 화랑이 되어 수련하였다. 가장 후진국이며, 세력이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화랑도라는 청소년 교육 제도 때문이다. 김유신은 화랑도의 교육과 낭도들과의 맺은 유대 관계는 이후 그의 정치적인 활동에도 중요한 바탕이 될 수 있었다.

김유신의 활동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쟁에서의 승리이다.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지금의 청주)을 공격하다 패배해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때 중당당주(지금의 연대급 지휘관)로 출전하였는데,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삼국사기’권41 김유신 전에 ‘옷깃(領)을 들어야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鋼)를 당겨야 그물(網)이 펴진다고 합니다. 제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홀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었다. 신라군은 이 기세를 이어 고구려군 5000여명의 목을 베고 1천여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둔 기록이 나온다. 이 전투의 승리는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에 눌려 있던 신라가 비로소 기운을 뻗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김유신은 45전 45승의 대 기록을 작성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로 3국 통일의 위업도 달성하게 되었다.

김유신 장군은 백전백승의 위대한 장군이면서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그리고 신라 백성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노력도 남달랐다. 계속되는 전쟁 중에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지나칠 때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군사들이 지치자 윗옷을 벗고 군사들의 맨 앞에 서서 행진했다는 일화, 그리고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이러한 노력의 단면들이다.

김유신 장군이 돌아가시자 왕은 장례를 국가적인 슬픔으로 갖추어 금산원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그리고 장군이 아니라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어 신하의 신분에서 임금의 신분이 된 위대한 인물이다.

진천으로 김유신 장군의 역사적 유적지를 찾아가 보자. 3국으로 나누어져 서로 반목하고, 죽이며, 갈등하던 민족적 비극을 극복하고 비로소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에게 여쭈어보자. 그리고 아직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반목과 아픔을 되풀이하고 있는 후손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남북통일의 숙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를 김유신 장군에게 그 지혜를 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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