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추게 하는
걸음을 멈추게 하는
  • 안상숲<진천생거진천휴양림>
  • 승인 2016.06.14 1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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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6월의 숲은 빈틈없이 다 채워졌어요. 봄부터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내던 숲의 식구들이 대부분 출석을 끝냈거든요.

숲의 꼭대기를 채운 나무들과 꼼꼼히 땅을 채운 풀들, 그리고 물속과 공중에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로 분주합니다.

숲의 분주함은 숨차지 않아요. 소란스럽지도 않아요. 오히려 고요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는 <새>들의 노래와 습지 못에서는 참개구리의 낮은 울음소리도 들려요. 1초에 200번의 날갯짓을 한다는 벌의 날갯짓 소리며 잎자루 긴 자작나무가 햇살에 부딪혀 팔랑이는 소리까지... 저마다 자기 소리로 존재를 드러내지만 숲은 그럼에도 고요해요. 숲의 소리는 위압적이지 않아 다른 소리를 덮지 않아요. 무엇이든 누그러뜨리고 다독여 차분하게 해요.

그래서 아무리 속이 상해도 숲 속으로 세 발만 들여놓으면 어느새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마음은 종달새처럼 노래하고 눈빛은 부드러워져요. 웃음과 생기를 감출 수가 없습니다. 숲이 내게 거저 주는 안위와 평온. 이만하면 더는 아름다울 수 없는 생이지요. 나는 고만 이 숲 어딘가에 있을 내가 채워야 할 빈틈을 찾아 숨고 싶어져요.

걸음이 자꾸 더뎌지다가 멈춰져요. 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요.

이끼로 덮인 묵은 바위에는 온몸에 이끼를 떡고물처럼 두른 밤나방 애벌레들이 <얼음>하고 굳어 있어요. 그만 <땡>하고 쳐주어야 살아날 것 같아서 손끝으로 툭 건드려요. 말캉한 살아있음이 손끝에 전해져요. 살아있음은 부드러운 거지요.

그 바위에만도 참 여럿이 모여 살아갑니다. 애알락 명주잠자리 애벌레가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먹이를 기다리며 잠복하고, 실금 같은 몸으로 실금 같은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는 유령거미도 있어요. 자기는 절대 아무것도 아닌 그냥 바위일 뿐이라며 바위 빛깔로 의태를 한 나방 한 마리도 납작 붙어 있어요. 바위에 붙어사는 아이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척하고 지내요. 죽은 척, 이끼인 척, 바위인 척하고 있어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꼭꼭 숨어도 술래가 된 나를 속일 순 없어요.

엉겅퀴 꽃 속에는 호랑꽃무지가 납작 엎드려 있지요. 이 꽃무지 녀석, 꽃밖에 모르는 꽃무지인지 꽃도 모르는 꽃무지인지 이름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어요. 꽃에 골몰하여 꽃잎마저 뜯어먹으며 짝짓기도 꽃 속에서 하지만, 꽃에 파묻혀 완전히 뭉개지도록 꽃을 망치니 꽃을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지경이지요. 꽃무지, 그의 무지는 어쩌면 사랑에 눈이 멀었기 때문인 것도 같아요.

산초나무 잎도 홀랑 뒤집어봅니다. 산초나무 잎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예쁜 머리띠를 하고 있는 호랑나비 애벌레도 산초나무 잎에 살지요.

에사키뿔노린재의 등에는 커다란 하트무늬가 있어요. 이 노린재도 산초나무에서 짝짓기하고 알을 낳아요. 대부분 곤충이 세상에 점 하나 찍듯 알을 낳으면 그만이지만 에사키뿔노린재의 어미는 알이 부화할 때까지 지키고 돌보아요. 더운 날에는 날개를 저어 부채질도 해주지요. 아마도 등의 하트무늬는 사랑이 많아서 새겨진 훈장인가 봐요.

한참이 지나 나는 그만 술래 하기에 싫증이 납니다.

이제 그만 내가 숨고 다른 술래가 나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술래가 된 다람쥐가 나를 찾아냈으면 좋겠어요. 술래가 된 두꺼비가 꼭꼭 숨은 나를 찾아줬으면 좋겠어요. 술래가 된 잠자리가 물푸레나무 곁에서 나무인 척 숨어 있는 나를 찾아내어 손잡아주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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