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에 힙합이라고 쓰다
역사책에 힙합이라고 쓰다
  • 임정숙<수필가>
  • 승인 2016.06.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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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정숙

할머니들이 랩을 한다. 요즘 힙합이 대세이나 격세지감을 느낀다. 나이 50대부터 80세까지 배우, 국악인, 강사, 일반인 등의 할머니 여덟 명이, 랩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래퍼’들과 한 조를 이뤄 랩 경합을 펼치는 것이다. 두 달여 동안 최후의 우승자를 뽑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다. 물론 무리수를 두고 시도해 본 예능이었을 것이다.

트로트와 발라드에 익숙한 나이 든 세대 대부분이 힙합에 친숙해지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본다. 나 또한 그런 떠들썩한 음악이 어디선가 귀에 들리면 소음이란 생각이 먼저였었다. 너무나 빠른 박자와 가사가 정적인 가슴으로 공감하기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새로운 세대의 기운 팔팔한 젊은 아이들만의 영역이려니 뻘쭘하게 건너다볼 뿐이었다.

더구나 힙합 의상과 머리 모양은 독특했다. 거리를 쓸고 다닐 듯한 헐렁한 바짓가랑이와 지나치게 긴 벨트, 큰 티셔츠에 자신의 발보다 커다란 신발을 신는 것도 탐탁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번쩍거리는 목걸이, 굵은 팔찌를 끼고 껄렁껄렁 춤을 추는 모습은 기성세대로선 낯설고 적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겉모습부터 일종의 저항감부터 앞섰다. 지금은 어느 정도 본인 개성에 맞게 다양하게 연출하는 추세인 듯도 싶다.

이변이었다. 경험과 연륜이 배인 할머니들의 살아온 이야기와 손자, 손녀뻘 되는 래퍼들의 톡톡 튀는 발상으로 세상을 풍자하는 랩은 청량한 사이다였다. ‘치매로 네 살이 된 어머니를 바라보는 애달픔, 바람 피면 넌 풍비박산이라는 귀여운 엄포, 조금 덜 쓰고 덜 먹으면 된다는 행복론, 또 하나의 가족 유기견에 대한 지극한 사랑, 질풍노도 사춘기 딸을 둔 속 터지는 엄마 하소연, 내 나이 팔십이지만 마음은 이십 대다. 내 어릴 적 썼던 일기장은 너희에게 역사책이다.’ 당당한 할머니의 강변 등 젊은 친구들과 주거니 받거니 랩을 읊으며 힙합다운 치장과 몸동작으로 진지한 무대 공연은 매번 눈물과 재미, 감동을 안겨주었다. 맛깔 나게 혀에 착착 달라붙은 가사는 쉬운 메시지로 전달되어 흥미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랩은 자신을 잘 드러내는 일에 서툰 사람들에게 응어리진 감정을 솔직하고 풍부한 자기표현으로 풀어냄으로써 치유가 될 법한 묘한 흡인력이 있었다. 미처 깨닫지 못한 힙합의 매력에 빠져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곤 했다.

‘힙합’이란 엉덩이를 흔든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970년대 초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음악 요소로 지금은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힙합의 한 축을 이루는 음악 요소가 랩이라고 한다. 말과 노래의 경계에 있다는 표현이 맞는 듯하다.

랩 또한 미국 빈민촌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흑인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느끼는 사회적 박탈감과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를 특유의 강렬하고 반복적인 비트와 가사로 만들어 즐기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기존 가요계 틀을 깨며 90년대를 뒤흔든 ‘랩’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남자 세 명인 신인 그룹의 ‘난 알아요’란 데뷔곡은 평론가의 악평도 따랐지만, 점점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격렬하면서도 유연한 춤 동작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리듬의 가사를 속사포처럼 읊으며 등장했다.

그 시절 난 결혼하여 첫 아이를 기르던 엄마였다. 처음엔 들어본 적 없는 파격적인 댄스 음악이 그다지 흥미롭진 않았다. 그러나 점차 청소년들의 폭발적 지지는 물론이고 온 국민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안겨 줄 만큼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화제작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서태지의 음악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만들어내면서 대중이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변해왔었다. 지금도 그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한 시대의 전설로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젊은 세대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변화의 물결을 무책임한 과장이나 억지로 외면하진 말아야 할 부끄러움이 들었다. 서로 북돋우며 포용하고 소통의 길을 만들고자 했던 할머니와 손주들 힙합의 조합은 새로운 전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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