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기억
내일의 기억
  • 박경희<수필가>
  • 승인 2016.06.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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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박경희

일요일 오후 남편과 함께 영화 ‘내일의 기억’을 보았다.

기억이란 부질없는 것이다. 한순간 치매 같은 질병에라도 걸려 일정부분의 지난 시간이 하얗게 지워져 버리고 나면 과거 어느 시절 내가 알았던 그 사람이 아무리 내 망막에 비친다 한들 그는 더 이상 내 앞에서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그를 기억함으로써 그는 내 안에 살아있고 내가 그를 더는 기억하지 못함으로써 그는 내게는 이미 죽은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영화리뷰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스토리 자체는 식상하리만치 진부한 소재다.

일 중독증 환자나 다름없는 50이 다된 어느 가장이 예기치 않은 시점에 서서히 앓게 된 치매라는 질병으로 인하여, 25년간 한 직장에만 충성하느라 너무 소홀히 했던 가족의 중요성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니 사람과 사람이 삶의 어느 시점 부분을 함께 공유하며 기억을 함께 쌓아가는 소중함에 대해서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랄까.

안성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일본 국민 배우 와타나베 켄의 혼신을 다한 연기력은 그야말로 더 할 말이 필요 없는 역시나 고개 끄덕이게 하는 그런 영화, 아내로 나온 여배우 역시 일본문화 특유의 절제된 슬픔을 잘 소화해낸, 그야말로 온 세상 남편들이 다 염원하는 그런 아내의 정석 혹은 이상형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부분에 대해서 난 이 두 배우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이렇게 완벽하게 만들어진 이 영화도 내 눈엔 안티적요소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굳이 여성학이나 페미니즘 시각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영화로 보이는 요인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일단은 감정처리 면에서 주인공 치매환자인 남편의 것은 섬세하고도 현실적으로 잘 그려졌지만, 아내의 것은 그저 교과서에 나온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원하는 이상형으로만 그려졌다.

에미코는 너무 완벽하다. 남편의 치매 사실을 알고도 그저 침착하게 삭히기만 한다. 물론 영화니까, 조연이나 마찬가지인 아내의 그 미칠 것 같은 감정처리 부문은 과감히 생략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대다수 남자는 아내상에 대한 못 말리는 환상에 한 번 더 깊이 빠질 수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자기를 의심하고 투정부리는 사에키를 향해 에미코가 처음으로 쌓인 울분을 토로하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 그 장면에서 흥분한 사에키가 들고 있던 사기접시로 에미코의 머리를 내리치고 에미코의 이마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하지만 에미코에게 자기 자신은 없다. ‘당신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된 것은 다 병 때문이에요’라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한다. 에미코는 여전한 미모, 절제된 감정, 그다음 액션을 너무도 일사불란하게 잘 취해가고 있다. 물론 병 때문이라는 거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내 이마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상황이라면 우선은 본능적으로 무서워서라도 옆집으로 피신한다거나 하게 될 텐데 그저 천사처럼 그 자리에서 폭력남편을 끌어안고 위로를 해주는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되는 광경이다.

치매 소재의 영화를 생전 처음 접할 뿐 아니라, 주인공과 같은 性이기도 한 내 옆의 남자는 ‘내일의 기억’에서 오히려 나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난 에미코 같은 일본여자들의 이런 완벽한 모습까지 본받아 두는 게 나의 신상을 위해서도 바람직하겠다 싶어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영화를 끝까지 무사히 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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