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깨다
꿈 깨다
  • 박윤미<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6.06.1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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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박윤미

백일도 안된 아이가 분명 또렷한 소리로 ‘엄마’라고 했다. 천재가 아닐까, 두 돌도 안 된 아이가 유모차 손잡이에 있는 ‘경고’란 문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또박또박 읽었다. 천재가 분명하다. 아이는 책 읽는 것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밤마다 잠자리에 열권도 넘는 책을 가져와서 적어도 두 번씩 읽어줘야 잠이 든다. 이 아이가 자라 S대라도 들어가게 되면 아이를 어떻게 이렇게 똑똑하게 키웠는지 책을 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입을 떼었을 때 나는 가장 기본적인 발성이다. 첫 돌 지나고 나서부터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파란 화면의 ‘경고’ 메시지를 읽어주었는데, 아이는 사진처럼 기억하고 있다가 유모차 손잡이에서 같은 그림을 발견했던 것이다. 책을 좋아하고 특히 반복해서 읽는 습관은 참 맘에 드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 고등학생인 이 아이가 S대에 갈 확률은 제로다.

천재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꿈이 어렴풋하게 깨진 것은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서였다. 사춘기의 증세는 무기력증으로 나타났다. 짜증이 잦아지고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했다. 거실 탁자 위의 참고서와 문제집이 시험이 끝나는 날까지 한 자리에 그대로였다. 학기가 끝나고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교재들을 쓰레기장으로 옮기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혼을 낼까, 달래 볼까? 다시는 사주지 말까?

아이는 1학년 겨울방학에 용돈을 모아 기타를 사고 학원비도 냈다. 뭐라도 하겠다는 게 다행이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하는 번거롭고 추운 길을 저만한 크기의 기타를 메고 다니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잠시라도 깊이 빠져들길 바랐다. 그렇지만 도무지 연습하는 걸 보지 못했다.

2학년 여름방학에는 용돈을 모아 *태블릿을 사고 만화학원에 등록했다. 딱 한 달 다니고 말겠지 했다. 깊이 빠져들길 바라기도 했지만 포기하고 공부에 몰입하는 반전을 기대했다. 엄마의 성공담을 더욱 극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학원을 그만두고서도 매일 컴퓨터에 매달려 그림을 그렸다. 아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그린다. 자연스럽게, 씁쓸하게 S대생 엄마로서의 꿈은 멀어져갔다.

얼마 전 꿈은 완전히 파기되었다. 진로 수업 발표 과제를 준비하며 말한 아이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그리는 것은 평생 먹고 싸고 자는 시간 외에 이것만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야.’

내게서 무엇인가 툭 떨어졌다. 실망감이 아니었다.

아이도 항상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진정 인정했었는지 되돌아본다.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현시대도 따라가기 버거운 무딘 센서로 빠르게 변해가는 미래의 지도를 아이 앞에 펼치며 억지스러운 안내를 하지는 않았는지,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마비하고 학업에만 몰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좁고 맹목적인 가치를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무엇보다 S대는 누구의 가치인지 되돌아본다.

아이는 이번 사흘 연휴에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올여름이면 꼬박 3년째이다. S대생 엄마로서의 꿈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이 아니어서 문득문득 아쉬움의 습격을 받지만, 예전보다 좀 더 잘 물리친다. 그리고 슬쩍 솔직해져 본다. 나는 18세에 그렇게 확실하고 절실한 것이 있었던가? 이적까지 살면서 무엇인가에 3년을 하루처럼 몰입한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내 꿈은 무엇이었던가?

*태블릿 : 컴퓨터에 연결하여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입력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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