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성재 <시민기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6.06.0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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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요즘 어머니 댁에 가서 자는 날의 횟수가 부쩍 늘었다. 전화 통화를 하다보면 직접적으로 오라고는 안하셔도 목소리에 왔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난다. 몸이 불편하니까 자식이라도 옆에 있어야 의지가 되는 모양이다.

어느 날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가 내 팔을 붙들고 식탁 앞으로 끌고 가신다.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은 것 같은데 난 바로 알아채지를 못했다.

“뭔 대요?”하고 묻자 어머니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꽃병을 가리키신다. 목이 약간 길고 투박해 보이는 도자기 꽃병에 장미와 목단 4송이가 꽂혀 있었다.

“내가 시집와서 처음 가졌던 꿈이 이렇게 집안에 꽃을 꽂아 놓고 사는 것이었단다. 그런데 죽을 날이 가까워서야 그 꿈을 이루는구나” 하신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19살 어린나이에 형제 많은 가난한 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월급으로 시동생들을 교육시키고, 열두 식구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억척스럽게 살아야했던 젊은 날의 어머니는 이룰 수 없는 가장 사치스런 꿈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웠으나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꿈이 무엇인가?’ 아니 ‘꿈은 있었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가 꾸었던 꿈이란 것들은 좋은 직장을 갖는 것, 승진하는 것, 돈을 많이 모으는 것, 내 집을 마련하는 것, 큰 집으로 이사하는 것, 좋은 차를 타는 것 등 한결같이 모두 삶의 욕구이거나 허황된 욕망의 부스러기들이었다. 진정으로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 같은 꿈은 무엇이었는지,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일하다가 안타깝게 숨진 19살 청년을 떠올렸다.

그 젊디젊은 나이에 오직 정규직이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위험한 일을 감내해야했던 그 청년이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미처 꿈을 펼칠 사이도 없이 고된 노동과 숨 가쁜 일정으로 바삐 떠다녔을 그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은 현재 꿈을 잃은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는데, 마침 퇴근길에 집에 들어가던 주민을 덮쳐 함께 세상을 떠나고만 그 청년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의 삶을 지켜줄 수 있는 안정된 일자리를 무척이나 갈망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욕구 앞에서 어쩌면 꿈은 사치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의 고단한 삶 속에 꽃 한 송이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 일들이 팔순이 훨씬 넘어서야 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언제부터인지는 꿈이라는 의미가 생존을 위한 욕구와 욕망의 의미와 혼재되어 버렸다.

그래서 ‘당신의 꿈이 무엇입니까?’ 라는 말이 ‘당신은 어떤 직업을 갖고 싶습니까?’라든지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싶습니까?’ 같은 생존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 생계를 해결하는 것조차 힘이 들어 그것이 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꿈꾸는 삶은 엄두내지 못하는 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해서 슬픈 것은 아니다. 정말 슬픈 것은 우리가 꿈조차 꿀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렵게 살아온 어머니에게도 분명 간절한 삶의 욕구와 욕망이 있었다. 세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내 집을 장만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하숙을 치며 악착같이 절약하며 돈을 모았다고 했다. 그리고 6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자신의 생명의 불꽃이 차츰 사위어 간다고 느꼈던 어느 날 오래도록 간직해온 꿈을 현실로 만드신 것이다,

그 꽃을 가리키며 내게 보인 어머니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꿈이 형태가 있다면 바로 그 모습일 것이다.

꿈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풍요로울 때 생기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등대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 한줄기 희망의 등불 같은 것이 꿈이 아닌가싶다.

꿈이 없는 삶은 이미 생명을 잃은 그저 존재의 한 방식일 뿐이다. 청년들의 허망한 죽음의 가해자는 꿈을 빼앗아간 자본주의 논리이다. 비통한 마음으로 꿈의 방향성을 다시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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