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슬램
그랜드슬램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6.0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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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골프를 권유하던 교수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있다. 내가 골프를 안 친다니까 한 이야기다. 그분에 따르면 골프를 치지 않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단다. 첫째, 돈이 없거나, 둘째, 돈이 아깝거나, 셋째, 둘 다거나.

나를 말하는 것만 같다. 하나만 더 꼽는다면 시간도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엔 나이 들어서 바쁜 것은 머리가 나쁘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도 못하겠다.

오죽 머리가 나쁘면 나이 들어서까지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게 일을 할까, 아니면, 아직도 남에게 일을 넘길 줄도 모를까. 그래서 시간이 없다는 소리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둔하긴 아둔한가 보다. 늘 쫓긴다.

미국서는 캠퍼스에 골프장이 있어 새벽마다 치기도 했다. 카트 없이 걷다 보니 살이 쑥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격도 우리 하루치 갖고 일 년 내내 칠 수도 있다. 돈도 크게 걱정 없고 시간도 가볍게 낼 수 있다. 우리와는 다른 상황이니 미국서는 캠퍼스 골프를 굳이 마다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한국 상황은 많이 다르다. 여전히 고급스럽다.

그런데 테니스는 교내에서 할 수 있으니 보통 행운이 아니다.

테니스장까지 이동이 5분이면 되고 군사용어로 일단 위수지역을 지킬 수 있어 위급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

게다가 학교시설이니 공짜다. 다른 학교처럼 테니스장이 많지 않아 이용자들끼리 경쟁이 됐던 시절이 있었지만 업무가 과중해진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일하다 보면 때를 놓치기 십상이다. 학생이 찾아와도 그래서, 간만에 용기를 내서 온 친구를 홀대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나가겠다고 작정을 해도 그 반이나 채울까 싶다.

나의 테니스 실력은 공식적으로 ‘가장 잘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못 한다’다. 열심히 해도 잘 칠까 말까 하는데 게으른 자세로 잘 치기는 이왕에 글렀다. 잘 치길 바란다면 도둑놈 심보다. 그러나 잘 치는 사람들이 어여삐 여겨 끼워줘서 어쩌다보니 잘 치는 팀 속에서도 놀게 되었다. 그런 내가 어쩌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물론 자칭이다.

처음은 총장배였는데, 잘 치는 파트너가 나보고 가만히 있으란다. 그러더니 우승해버렸다. 덕분에 트로피도 받았다.

내 방에 들린 사람들이 트로피를 보고 잘 치는 줄 알지만 전혀 아니다. 전적으로 파트너 덕분이었다.

다음은 단과대학대항전이었는데 여기서는 어쩌다 상대방의 공격을 자꾸 넘기니까 그쪽에서 실수를 연발하기 시작해서 엉겁결에 얻은 승리였다.

3 복식 가운데 우리 팀은 버린 팀이라서 건너편에서 잘 치는 사람들이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우리 팀이 소 뒷걸음치다 뭐 잡듯 이기는 바람에 그쪽 게임은 할 필요도 없어져 버렸다. 기뻐서 인문대 단체복을 사서 돌린 것이 기억난다.

세 번째는 전국교수테니스대회였는데 우리 팀이 그만 우승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후보였다. 나는 경기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줄을 잘 서는 바람에 금메달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고 하니, 동료들 반응이 그런 말을 하려면 일반적으로 4개 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단다.

그러다 이번 전국대회에서 분쟁이 난 두 팀이 모두 게임이 몰수되는 바람에 우리 팀이 진출하는데 일조를 하게 되어 그랜드슬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쪽 팀의 어떤 교수가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 듣자하니, 말다툼 가운데 이미 ‘양심’과 ‘정의’라는 단어가 오고 갔단다. 몸 굴려 머리를 비울 때 이렇게 어려운 낱말을 쓸 일이 아니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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