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과 숟가락
컵라면과 숟가락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6.06.0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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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진짜 절망마저 사치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컵라면과 숟가락, 그리고 작업도구들만이 남겨진 가방은 열아홉 살 97년생 비정규직 청년의 희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비통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 아이를 기르면서 책임감이 강하고 떳떳하고 반듯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이에게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며 키우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책임감이 강하고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에게 개죽음만 남을 뿐입니다. 첫째를 그렇게 키운 것이 미칠 듯이 후회됩니다.”는 말로 울먹이는 구의역 사고 희생자 어머니의 기자회견은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두루 관통하는 불안의 적나라함이다.

숟가락은 생명의 수단이고, 거기 뚜껑이 뜯기지 않은 컵라면은 처절한 비정규직의 삶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유일한 끈일 수밖에 없다,

배곯음을 견디면서 비록 비정규직일지라도 착실하게 돈을 모아 대학에 가고 싶다는 희망으로 아침 출근길마다 가방 속에 품었을 쇠숟가락은 주인을 잃어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상징이 되고 말았다.

수백만의 동시대 서울사람들이 이용하는 지하철에서 홀로 수없이 덤벼드는 죽음의 위험을 무릎 쓰는 19살 청년은 어딘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숨어들 듯 컵라면을 그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 왔을 것이다.

한창 팔팔하고 혈기왕성한 젊은이의 한 끼 식사로는 어림없는 컵라면은 어쩌면 비극적 죽음으로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세상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아!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 모른다. 19살 비정규직 청년의 희망은 우리 모두의 것은 이미 아니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며 눈칫밥을 먹었을 97년생 젊은이의 불평등은 얼마든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나만 아니면 되는 일임을 짐짓 모른 체하며 살고 있음을 깨닫지 않으려 한다.

일상이, 그리고 고단한 개개인의 삶이 모여 결국은 사회 공동체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세월호 침몰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아이들과 구의역 희생자가 97년생 동갑이라는 기막힌 현실도 살펴 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죽어서도 가슴에 묻은 한이 지워지지 않을 구의역 희생자 어머니의 피멍든 절규는 세상의 진리와 자유, 그리고 평등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며, 결코 지켜지지 못할 불신과 불안의 상징적 절규와 다름없다.

남은 자식에게는 강한 책임감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것은 국민의 의무가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의미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

그리고 떳떳하고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대한 한 맺힌 후회는 세상이 얼마나 비굴하며, 또 얼마나 편법으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웅변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강하지 않게, 눈치만 살피면서 대충대충, 지시를 따르기 보다는 얕은 꾀를 쓰더라도 적당히 살아가는 방법이 개죽음을 피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각인된 세상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커진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희망. 97년생 19살 젊은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구의역 스크린 도어에 펄럭이는 노란색 포스트잇의 추모만큼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컵라면과 숟가락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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