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깊은 계단
내 안의 깊은 계단
  • 이지수<청주 중앙초>
  • 승인 2016.06.06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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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말하는 행복한 책읽기
▲ 이지수

하늘이 잿빛이다. 청주의 하늘은 지나는 바람이 성의없이 대충 그려놓은 그냥 잿빛이다. 쉼 없이 부는 바람에 뭉쳐 있던 잿빛 구름이 전체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니, 일종의 안도와 공허함이 든다.

슬하의 두 아이가 자라며 내가 얻은 것은 일종의 안심이었다. 아이들 스스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에 대해 알며, 배우며 자신이 그룹의 일원으로 잘 해내 갈 것이라는 믿음이 내 심리적인 안도감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반대로 아이들이 태어난 직후부터 혼자서 무의식중에 갖고 있던 불안감과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들었던 ‘삶, 인생? 그거 별것 아니란 생각’이 공허함의 진짜 이유였다.

육아에 대한 강박증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니 그 자리를 내 본연의 모습이 채워지게 된 것인데…. 그 형체가 공허함이라니.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다. 삶은 반복이고, 인생은 실수의 연속이라던가? 오늘은 지금과 똑같이 한없이 예민하고 섬세했던 1999년 대학서점에서 만났던 책 한 권으로 나 자신에게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

‘내 안의 깊은 계단(강석경, 창작과 비평사)’의 표지에는 제목 밑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고독은 선험적인 것인지도 몰라.’, ‘고독해서 불안정하고 격정에도 휩싸이는 거야.’기억이 난다. 바로 이 두 글귀 때문에 이 책을 구입했었다. 서른 중반을 넘긴 지금도 고독해서 울먹이는데 스무 살에 고독, 불안정이라는 글귀로 마음을 빼앗기다니. 어쩌면 이 문제를 평생을 고민해도 영원히 답을 모를 것이라는 불안한 짐작은 앞으로도 쭉 들어맞을 듯하다.

책 속의 주인공 소정은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지만 현실에서는 어쩐지 적응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인물이다. 소정의 사촌인 강주는 고고학자로서 오래전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생활했을 과거의 이들을 발굴하는 사람인데, 강주에 대한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든다. 존재는 했으되, 더는 현재에는 없는 죽은 이들에 대한 감정. 그것은 슬픔이나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 담담함 같은 거였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도 죽음의 사자가 데려간 것은 정작 잃을 게 아무것도 없던 소정의 오빠 강희가 아닌 강주였다. 삶에는 동정이 없다. 우연과 스스로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 선택의 끝도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다. 정답을 알고 간다면, 그 길은 단조로워서 지겨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소정 역시 창사의 여행을 마친 후 본연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도서관에 사표를 던진 후에는 호주로의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커다란 줄거리는 이렇지만, 300페이지가 넘는 소설 속에서 작가가 풀어내는 천년의 고도 경주에 대한 이야기나 발굴, 고고학, 중국의 창사에 대한 부분은 감히 감상을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박식했으며, 뛰어난 작가의 묘사로 모든 장면들이 눈에 환히 보이는 듯했다. 이 소설의 영향으로 부여와 경주는 몇 번 다녀왔고, 이제 내 인생의 가고 싶은 여행지 버킷리스트 중에 아직 창사가 남아있다.

소설을 시작하자마자 몇 장 안 넘겨서 여주인공인 ‘소정’이 사는 곳이기도 하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청주의 무심천에 대한 부분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생각하며 무심히 물 흐르듯 살아왔을 것이다 라는 부분. 어쩌면 작가는 인간의 선험적이라는 고독, 그러니까 제목의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쉼 없이 흐르는 물에 빗댄 것은 아닐까. 쉴 새 없이 흐르지만, 그 물은 더는 예전에 흘렀던 물이 아닌 것처럼.

공허함을 느낀다는 것은 나 자신을 느낀다는 말이고 고독은 곧 누구에게나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 내 본연의 모습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정리해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그게 곧 내 삶의 본질이 되리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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