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이 필 때면
장미꽃이 필 때면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6.06.0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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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녹음이 한층 짙어졌다. 길가에 붉은 장미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장미꽃이 필 때면 돌아가신 시아버님 생각에 눈물이 난다.

내가 시집왔을 땐 아버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아버님의 생전 모습은 뵐 수 없었지만 젊은 시절 그 모습을 낡은 흑백사진으로 보고 기억할 뿐이었다. 아버님은 6·25전쟁 당시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싸우시다 전사(戰死)하셨다고 한다.

신혼 시절,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유월 어느 날이었다. 우리 내외가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그곳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묻힌 영원한 안식처다. 부모님과 자식을 잃고 그리움에 찾아오는 이들이 많은 이곳은 유족들의 한과 슬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경내에 들어서니 엄숙한 분위기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이어 우리는 아버님의 위패가 모셔진 봉안소로 향했다. 그 당시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위패만 남아서 고인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전쟁의 참담함을 비로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산야에 흩어진 호국용사들의 유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나는 아버님의 성함이 새겨진 위패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아버님께 장미꽃 한 송이를 바치고 머리 숙여 명복을 빌었다. 또한 순국의 충절이 배인 비문을 읽어내려 가는 동안 등줄기가 서늘해져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설움에 겨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다시는 동족이 둘로 갈라지는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해마다 장미꽃이 필 즈음이면 고뿔을 앓듯 남편의 가슴앓이가 고개를 들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남편은 어린 시절 주변에 동정의 시선보다 견디기 힘든 건 외로움이라 했다. 기구한 운명이라는 말이 이런 때 쓰는 말이던가. 아름다운 계절에 쓰라린 전쟁으로 인해 남편은 아버지를 잃었다. 현실을 감당해 내기엔 혹한에 꽃잎 찢기듯 아팠으리라. 깊은 상처만큼이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도 컸으리. 부자지간의 인연이란 얼마나 지중한 일인가. 나는 안다. 자식에게는 아버지가 단단한 울타리라는 것을. 그래서인가. 보훈의 달 유월이 오면 나는 위로의 말조차 조심스러워 말을 아낀다. 아내로서 남편이 눈물 흘릴 때 그저 눈감아줄 뿐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운명이라 했던가. 우리의 인생은 내 의지대로 되진 않는다. 가던 길을 멈추게 되면 한 생애가 끝나는 것이다.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하루하루 무탈하게 가족들과 오래도록 다복하게 사는 일이 얼마나 큰 행복인 줄 모른다.

며칠 전 아버님의 기일이었다. 그날도 아파트 담장엔 붉은 장미가 환하게 피었다. 그 꽃이 아버님의 넋인 양 눈물이 났다.

한철에 피는 장미꽃처럼 젊음을 국가에 바치고 등불처럼 떠나신 아버님.

예전엔 내게 장미꽃은 그저 붉은 꽃이며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고귀한 꽃, 숭고한 꽃이며 아버님의 영혼의 꽃으로 기억한다. 아버님은 떠나셨지만 내 가슴속에 피는 장미는 영원히 지지 않을 것이다. 유월이 아프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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